♧ 아내의 계명 · 2 - 임보
“술값을 먼저 내세요!”
술자리에 불려 나간 내게
아내가 당부를 한다
술값은 안 주면서
술값을 먼저 치르라니…
그래도 아내의 충고가 무던해서
술값을 내가 치르겠다고 나서면
내 형편 뻔히 아는 상대방이
가만있질 않는다
“그래, 다음에 내게, 다음에 내!”
그래서 계명의 실천은 또 연기된다
술도 못 자신 아내는 어떻게 알았을까?
술자리에서 오간 얘기가
술값보다 더 비싸단 사실을…!
♧ 고향 강가에서는 – 정순영
해질녘 고향 강가에서는
어릴 적 추억을 찾아 온 두루미 몇 마리가
강물을 첨벙첨벙 걸으며 개구쟁이 노릇을 하고 있네.
한 마리 두루미는
강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우두커니 들여다보더니
돌아오지 않는 죽마고우竹馬故友를 생각하며
우수에 젖어있네.
이 겨울 지나고 봄이면 떠나 가을에 다시 올 수 있을까
강바람에 흰 머리 날리며 고향 찾은 나그네처럼
양 볼에 회한의 눈물을 적시네.
♧ 고목 탱자 - 민구식
보경사* 뒤안 동짓날 아침
수백 장독 혼자 지키는
탱자나무 한 그루
속이 비어 가볍다
더 크지 않으려는 바람이 두 길 높이에서 멈추고
나이테도 의미 없이 껍질만 남은 채
가시 돋친 말씀이 짙다
비워야 소리 한 줄 머금는다고
바람소리 빈 몸 안에 가두느라
차고 모진 바람 잡고 흔들린다
비우고 또 비우려고
염불한 세월 400년이 모자라
참새들 독경하는 새벽에
살랑살랑 바라춤을 춘다
나도 찬바람에 나풀나풀
비우려고 살랑살랑
심메[心山] 더듬으며
골짜기 덮은 구름 위에서
승무(僧舞)를 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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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경사 : 포항시 북구 송라면 내연산 고찰.
♧ 목련나무 오르기 - 마선숙
어머니 세상 뜬 후
첫 제사 모시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목련나무 아래서
지방을 성냥불로 태운다
창백하게 웃는 얼굴이 목련 같았던 어머니
타지 못한 불안들
어머니의 흰 머릿수건처럼
허공으로 올라간다
담배 한 개비 입에 문다
어머니와 함께한 평생을 몰아 피운다
매캐한 연기
어머니 쫓아 목련나무로 기어오른다
이제 백지처럼 고요해질까
너울너울 불길 기억하지 못하는
그 꽁초
♧ 봄날 – 김은옥
초록이 햇살을 아무리 받아먹어도 햇살이 남아도는 한낮
햇볕에 부푸느라 벚꽃 살 떨리는 날
잎사귀 하나 함부로 떨구지 않고 어린잎에 햇빛 어른거릴 때
날씨가 찢어지게 좋아서 묵은김치 쭉쭉 찢어 밥 위에 얹어 먹는다
구름이 흰 당목 같다
마당 가득 병아리 떼
내 젊음의 봄날을 데려다
김치 한 가닥 쭉 찢어 건낸다
♧ 선암사 매화 - 정성수
선암사 각황전 담벼락 홍매화와 원통전 뒤 백매화가
앞 다퉈 꽃을 피웠다
북풍 몰아치던 지난겨울에도
향기만은 팔지 않았다며 으스대는 것이었다
나는 아랫도리를 까고 ‘깐뒤’ 매우틀에 걸터앉아
임금님처럼 매화를 밀어냈다
끙~
얼굴을 붉혀가며
분분糞糞히 지는 매화 향기 선암사에 가득할 때까지
---
*선암사仙岩寺 : 한국불교 태고종太古宗 총본산으로 전남 순천 소재.
♧ 냉이 – 성숙옥
긴 뿌리가
거침없이 코끝을 점령한다
쓸쓸하고 추운 시간을 견딘
땅심으로 된장찌개를 끓인다
비발디의 봄이
보글보글 끓는다
모든 것 당신에게 바친다는 꽃말을 띄워
식탁 정원에 올리니
달그락달그락
향기를 나르는
숟가락들
현처럼 긋는 허공의 리듬이 경쾌하다
*시 : 월간『우리詩』2020년 03월 381호에서
*사진 : 요즘 한창 피어나고 있는 목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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