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3월호의 시와 목련

김창집 2020. 3. 3. 14:02

 

♧ 아내의 계명 · 2 - 임보

 

“술값을 먼저 내세요!”

 

술자리에 불려 나간 내게

아내가 당부를 한다

 

술값은 안 주면서

술값을 먼저 치르라니…

 

그래도 아내의 충고가 무던해서

술값을 내가 치르겠다고 나서면

 

내 형편 뻔히 아는 상대방이

가만있질 않는다

 

“그래, 다음에 내게, 다음에 내!”

그래서 계명의 실천은 또 연기된다

 

술도 못 자신 아내는 어떻게 알았을까?

 

술자리에서 오간 얘기가

술값보다 더 비싸단 사실을…!

 

 

♧ 고향 강가에서는 – 정순영

 

해질녘 고향 강가에서는

어릴 적 추억을 찾아 온 두루미 몇 마리가

강물을 첨벙첨벙 걸으며 개구쟁이 노릇을 하고 있네.

한 마리 두루미는

강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우두커니 들여다보더니

돌아오지 않는 죽마고우竹馬故友를 생각하며

우수에 젖어있네.

이 겨울 지나고 봄이면 떠나 가을에 다시 올 수 있을까

강바람에 흰 머리 날리며 고향 찾은 나그네처럼

양 볼에 회한의 눈물을 적시네.

 

 

♧ 고목 탱자 - 민구식

 

보경사* 뒤안 동짓날 아침

수백 장독 혼자 지키는

탱자나무 한 그루

속이 비어 가볍다

 

더 크지 않으려는 바람이 두 길 높이에서 멈추고

나이테도 의미 없이 껍질만 남은 채

가시 돋친 말씀이 짙다

 

비워야 소리 한 줄 머금는다고

바람소리 빈 몸 안에 가두느라

차고 모진 바람 잡고 흔들린다

 

비우고 또 비우려고

염불한 세월 400년이 모자라

참새들 독경하는 새벽에

살랑살랑 바라춤을 춘다

 

나도 찬바람에 나풀나풀

비우려고 살랑살랑

심메[心山] 더듬으며

 

골짜기 덮은 구름 위에서

승무(僧舞)를 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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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경사 : 포항시 북구 송라면 내연산 고찰.

 

 

♧ 목련나무 오르기 - 마선숙

 

어머니 세상 뜬 후

첫 제사 모시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목련나무 아래서

지방을 성냥불로 태운다

 

창백하게 웃는 얼굴이 목련 같았던 어머니

 

타지 못한 불안들

어머니의 흰 머릿수건처럼

허공으로 올라간다

 

담배 한 개비 입에 문다

어머니와 함께한 평생을 몰아 피운다

 

매캐한 연기

어머니 쫓아 목련나무로 기어오른다

 

이제 백지처럼 고요해질까

너울너울 불길 기억하지 못하는

그 꽁초

 

 

♧ 봄날 – 김은옥

 

초록이 햇살을 아무리 받아먹어도 햇살이 남아도는 한낮

햇볕에 부푸느라 벚꽃 살 떨리는 날

잎사귀 하나 함부로 떨구지 않고 어린잎에 햇빛 어른거릴 때

날씨가 찢어지게 좋아서 묵은김치 쭉쭉 찢어 밥 위에 얹어 먹는다

구름이 흰 당목 같다

마당 가득 병아리 떼

 

내 젊음의 봄날을 데려다

김치 한 가닥 쭉 찢어 건낸다

 

 

♧ 선암사 매화 - 정성수

 

선암사 각황전 담벼락 홍매화와 원통전 뒤 백매화가

앞 다퉈 꽃을 피웠다

북풍 몰아치던 지난겨울에도

향기만은 팔지 않았다며 으스대는 것이었다

 

나는 아랫도리를 까고 ‘깐뒤’ 매우틀에 걸터앉아

임금님처럼 매화를 밀어냈다

끙~

얼굴을 붉혀가며

 

분분糞糞히 지는 매화 향기 선암사에 가득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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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仙岩寺 : 한국불교 태고종太古宗 총본산으로 전남 순천 소재.

 

 

♧ 냉이 – 성숙옥

 

긴 뿌리가

거침없이 코끝을 점령한다

 

쓸쓸하고 추운 시간을 견딘

땅심으로 된장찌개를 끓인다

 

비발디의 봄이

보글보글 끓는다

모든 것 당신에게 바친다는 꽃말을 띄워

식탁 정원에 올리니

 

달그락달그락

향기를 나르는

숟가락들

 

현처럼 긋는 허공의 리듬이 경쾌하다

 

 

                                                *시 : 월간『우리詩』2020년 03월 381호에서

                                                      *사진 : 요즘 한창 피어나고 있는 목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