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들(2)

김창집 2020. 5. 11. 00:25

♧ 침묵

 

내 마음 가는 곳 기억하고 있었다.

 

마음 세우고 나를 기다려 준

 

보고 싶은 그리움 이젠 입을 열어도 좋아.

 

♧ 옹이 - 우정연

 

아파트 뒤란에

늦겨울 비에 이리저리 뒤척거리다

떨고 있는 늙은 벚나무 한 그루 있다

나는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헤져

쓰라린 상처 안고 있는 그가 안타까워

몹시 바람 드세던 날의 추위와

덜컹거림도 다 지나갔다고

토닥토닥 등 두드려 위로해준다

 

팔월 배롱나무 가지 끝에 머물던 생각이

봄날 배꽃 사이를 넘나들며

구부러진 바람처럼 선을 그리는 동안

골과 골의 곡진 곳을 드나드는

흐느낌 같은 숨결, 풀잎처럼 파르르하다

 

서슬 푸른 폭설 후려칠 때마다

흘린 눈물로 가슴 저렸더냐

다만 스쳐 간 흔적일 뿐인데

밤이 깊어가도록

잠 못 이루고 가느다랗게 이어지는

한 줄기 미세한 떨림이 있다

 

♧ 표류하는 오월 – 권지영

 

오월 속에 표류하다

정박,

 

꽃이 꽃인 줄 모르고

떠남이 이별인 줄 모르고

손 내밀면

아무것도 닿을 수 없다는 것이

메마른 기도 같아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의미가 되었던 순간들

 

비가 내리고

다 가 버리고

 

우는 법을 잊었다

그저

잊는 법만 남았다

 

♧ 소확행小確幸 - 김순영

 

잡곡밥을 안친다

된장국 끓이고

겉절이 버무려서

사랑 듬뿍 넣은

소소한 저녁을 차린다

 

밥상에 둘러앉아

시들시들한 하루를

질겅질겅 씹는다

억세고 아린 맛이 엷어진다

파릇하게 돋아나는 시간들

올곧게 배가 부르다

 

♧ 목련 ㅡ 김해미

 

허공의 암자 한 채

일생을 가도 닿을 수 없다

비구니 파아란 정수리인 듯

불 밝힌 동그란 연등

눈부신 경전을 필사하고 가는

흰 나비떼

독송하는 멧비둘기

아래 한나절쯤 앉으면

전생의 전생, 그 전생의 전생

무량한 죄업이 닦아질까

떨어져 내리는 해진 장삼

하산하셨는지

열반에 드셨는지

암자 무너진 터에

연두는 무성인데

나는 어느 암자로 가

흰 초 켜고

백등白燈을 달까

 

♧ 개구리주차 - 김건화

 

   좌충우돌 경차가 인도와 차도에 반쯤 걸쳐 개구리주차를 한다

   내가 하긴 버겁고 남 주긴 아까운 애인을 경계할 때 그냥 친구로 지내자는 것은 한쪽 발은 친구라는 명목 아래 이별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지 않기 위해 걸쳐 놓은 받침목이다

 

   아래로 내리지 못한 한쪽 바퀴의 미련과 위로 올리지 못한 바퀴의 소심함이 공평한 기울기를 흥정한다 적당한 거리는 안정감을 주기에 자신을 속이고 교묘히 핑계를 만들어 단속을 피해 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타협점의 경계에 놓아둔 한쪽 발이 왜 이리 불안하고 설레는지 함부로 쏟아낸 열정에 배신당하고 얻은 견인할 수 없는 엉거주춤의 과태료는 얼마일까

 

   오늘도 단속을 피해 개구리주차를 한다

 

♧ 봄비 - 차영호

 

봄비는 족집게를 가지고

봄을 뽑아 올린다.

 

살구나무 등걸에서 살구 꽃망울

제비꽃 불탄 자리에는 제비꽃

어두컴컴한 물속 갈대 우듬지에서도 갈대 여린 싹을

쏙쏙,

 

용하다.

 

참말로

용해서 겨울마녀도 암팡진 얼굴

누굴누굴 누그러뜨리고…….

 

벌이랑 풍뎅이, 제비, 송사리 떼

한눈팔아도 걱정 없다.

 

                                        * 월간 『우리詩』 05월 383호에서

                                          * 사진 : 5월 5일, 큰노꼬메오름에서 찍은 백작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