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도
철썩
뺨에 파도가 쳤다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한 번 뺨을 향해 달려오던 파도는
옆으로 꼬꾸라졌다
고름이 부풀어 터질 듯한 바다
게들처럼 줄지어 선 배들은
며칠째 포구에 묶여 정박 중이고
기름때 덕지덕지 묻은 아버지 등 너머
바람에 요란스럽게 부딪치는 술병들도
며칠째 마루에 정박 중이다
바다도 아빠도 나도
모두 아픈 밤이었다
♧ 산지등대
백 년 등대 산지등대에서 고백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해서
저녁 일곱 시 산지등대로 나와 줘
메시지 보내고 너를 기다렸는데
바다를 열 번 접었다 펴도 안 오고
별을 다 헤도 안 오고
못 온다는 연락도 없고
빨리 오라 전화하려니 부끄럽고
한쪽 볼에 시린 밤 꽉 물고
다른 한쪽 볼에 너의 이름 꽉 물고
달을 따라 서쪽으로 기우는 눈물 닦으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면
꺼진 등대 아래
머뭇거리던 발자국이
낙서처럼 흩어진다
♧ 백비 앞에서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하고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는 백비에
이름 없이
갓난이로 불리던
아기의 식은 볼
그 아기를 안고 죽은
어미의 탱탱 불은 젖
북촌 마을로
고개 돌리지 못한
아비의 뒤집힌 눈
눈보라 헤치며
서우봉으로 달리다 넘어진
할머니의 굽은 등
할아버지 제사상과
무남촌 제사상을
밝히던 촛불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유해의 입김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고 싶어
짝꿍이 위령탑으로 이동해야 한다며
팔을 잡아당기는데도
발을 뗄 수 없었다
♧ 비양도
숨과 숨이 마주치는 시간을 파도라 하자
너에게로 달려가면 나에게로 도착하는 곳
우리는 지도에 나오지 않는 섬처럼
서로 바라보아야 말을 들을 수 있고
서로의 연두가 보이고
서로 등을 만져보고 싶어 하고
서로 울음을 안아 저녁을 만들고
돌아갈 방향을 잃으면 가슴에 민들레가 피고
바람과 동음으로 노래를 부르면 별은 반짝이고
♧ 숨비소리
저 섬에서 오고 있었다
옹알이하는 별처럼
첫 음은 갈매기 날개처럼
물마루를 퍼덕거리다가
검은 모래 틈 속까지 채우는
뜨거운 손짓이었다가
온통 파란 자장가를 잇는
간절한 가락이었다가
낮달 꽉 물고 핀 해당화를
화들짝 지나는 바람이었다가
단추 풀어 젖을 꺼내 달려오는
물 밴 발소리였다가
젖은 베개 움켜쥔
배곯은 나의 울음이었다
♧ 소라 맛 보려면
소라 맛을 보러 왔다며
술 한 잔 먹고 소라 몇 번 씹고
소라 맛 좋네 하는 손님에게 엄마는 말했다
고추 맛을 보려면 수백 개의 해와
수백 개의 달과 수만 개의 빗방울을 생각한 다음에야
아삭한 고추 맛을 아는데
소라 맛을 보려면 마라도 끝에서부터 오는 물살과
수십 번의 숨비소리를 생각한 다음 먹어야
소라의 고소함을 알 수 있어요
아주메 소라 맛 알다가 세월 끝나면 어쩌요
소라 잡다 세월 끝나는 사람도 있으니
소라 맛 알다 세월 끝나는 사람도 있어야지요
소라 팔며 자식 키우다 세월 끝나는 부모가 있으면
부모 맘 알려고 세월 끝나는 자식도 있을 테고요
오늘 먹은 소라가 세월 끝 바라보는
여든 할머니가 잡은 소라예요
나를 힐끔 돌아보지 않고
해녀 식당 지붕 들썩이도록 큰 소리로 말한다
♧ 시인의 말
바닷물은 짜고, 달고, 쓴 맛이 납니다. 이 시집도 그 바닷물 같기를 바랐습니다. 눈물 같은 짠맛과 마음에 가장 오래 남는 쓴맛 그리고 짠맛과 쓴맛 뒤 쾌감을 불러오는 단맛 나는 시들로 청소년 여러분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처음 바다에 갔을 때 “바다를 보진 못하지만 심장이 바람에 씻기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시가 그런 바다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청소년 여러분이 이 시집을 읽고 감동과 즐거움을 느끼고 심장이 씻기는 바닷바람을 맞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략)
2020년 봄 바다에서
허유미
* 허유미 시집 『우리 어멍은 해녀』(창비 청소년시선 28, 2020)에서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들(2) (0) | 2020.05.11 |
---|---|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들(1) (0) | 2020.05.08 |
오영호 시조시집 '연동리 사설'의 4.3시 (0) | 2020.04.11 |
월간 '우리詩' 4월호의 詩들(2) (0) | 2020.04.08 |
조영임 교수의 '역병과 한시'에서 (0) | 2020.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