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방폭포*
떨어지는 것들은
모두 바다가 된다는 곳이라서
누구는 떨어진 성적이
누구는 떨어진 오디션이
누구는 짝사랑에 괴로운 눈물이
무지개 물방울로 떨어져
바다가 되기를 바랄 때
발아래 밟고 있는 까만 자갈들이
폭포처럼 추락했지만
바다가 되지 못한
수백 개의 눈동자로 보인 건
나뿐일까
폭포 소리와
파도 소리 사이를 메우는 바람에
할아버지 비명이 서렸을까
칠십 년이 지나도 스물다섯 살
까만 자갈 같은 흑백 사진 한 장으로만
남겨진 할아버지가 떨어지던 날
폭포와 바다는 붉게 물들었을까
하얗다 못해 투명한 폭포로
검은 그림자를 품고 있다
--
* 제주 4․3사건 당시 학살터.
♧ 눈물 한 방울
바다는 해녀의
거대한 눈물 한 방울이라서
파도는 눈물 한 방울의
흔들거리는 몸짓이어서
눈물 한 방울이 섬을 꼭 안고 있어서
우리는 해질녘이면
눈물 젖은 몸으로
가족의 이마를 만져 주어서
노래를 부르고 있어서
별은 눈물의 깊이를 알고 있어서
바다에서 사뭇 반짝이고
눈물에 가라앉은 숨비소리는
찬바람을 모으고 있어서
바다가 바람보다 커서
눈물의 온기로 섬이 잠들어서
발아래 훌쩍훌쩍 물결치는 밤이어도
우리는 등대처럼 서로의 어두운 얼굴을
거대한 눈물 한 방울로 감싸고 있네
♧ 해녀 딸
섬 너머 섬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자전거를 밀어주면
청보리밭 사잇길 휘파람은 길어지고
휘파람 끝에 해녀복을 깁던 엄마
너울너울 팔을 흔드시네
자전거바퀴 원주보다 크게 크게
빈 고둥 속으로 노을이 모이고
엄마 발밑 성게 껍질 무더기 위에
육성회비 고지서 반듯이 접혀 있네
손가락 마디마디 파도 자국 주름진 손
골라낸 성게 알은 소금기에 그을린 얼굴처럼 붉고
나는 어제보다 봉긋한 가슴으로 엄마를 불러 보네
♧ 절울*
섬의 입김을 받으며 자란 우리는
연두를 닮고 파랑을 닮고
모래는 보말 껍데기로 무지개 주문을 외우며
나를 불러내고 동무들을 불러내고
뚜껑 열린 장항*처럼 땡볕만 쫓아 뛰어다니던 하루
섬이 사람을 안고 저물어가면
불경처럼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물에 들던 어머니는 잠시 두 손을 모으시네
--
* ‘바다가 우는 소리’를 뜻하는 제주어.
* 간장, 된장 따위를 담는 항아리.
♧ 해녀는 섬이 됩니다
열네 살 때 바다로 가라앉은
섬이 있다 그 뒤로
내게만 보이는
섬이 있다
혼자 하굣길을 걸을 때
주머니에 휴지처럼 구겨진 성적표가 있을 때
친구와 다투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자꾸만 눈물이 핑핑 돌 때
등을 쓰다듬어 주는
섬이 있다
아버지가 밤 조업을 나가면
온기 꺼진 방으로 들어와 나를 품에 안고
언 몸 녹여 주는
섬이 있다
먼 바다를 표류하여도
눈이 시리도록 나만 바라보고
열네 살부터 소리쳐 우는
섬이 있다
* 허유미 시집 '우리 어멍은 해녀' (창비 청소년 시선 28, 202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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