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강연익 시집 '지는 꽃잎처럼' 발간

김창집 2020. 7. 3. 11:17

시인의 말

 

  뭍에 돛을 내리고 어언 등단 10여 년 돌아보니 인생의 사계절을 운명처럼 맞이하면서 이제 한 자락 노을빛에 물들어 갑니다.

  줄달음쳐 달려온 인생길에 발버둥치던 흔적들이 삶의 애환 속에서 샘솟는 자아의 모습, 이제 다 묻혀 버리기에는 너무 아쉬워 넉넉한 마음으로 기쁨이 되기를 바라며 위안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먼 길 돌아온 것 같지만 돌고 돌아 제자리 찾아오는 이 자리에 서서 내가 낸 길을 성큼성큼 걸어온 나를 뒤돌아보며 혼자서 살 수 없듯이 나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이곳까지 동행하게 된 수많은 은혜로운 자연과 주위에서 도움을 주던 이웃에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한생 살아온 그림자가 바람에 지는 꽃잎처럼 사라질 자연의 법칙에 소리 죽여 내 영혼의 소리를 낙엽에 새겨 바람에 떠밀어 보냅니다.

 

                                                                 20205

                                                                 은암 강연익

 

이별 연습

 

어둠을 끝내고

아침 해가 떠서 가는 시간

머물다 다가서는 노을에 묻혀

소멸해가는 내 모습을 본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보낸 시간

머물다 세월에 묻혀버린

그림자 없는 내 모습을 본다

 

하루를 끝내고 찾아오는 어둠 속에서

그 때의 고통과 기쁨과 슬픔이

내 안에 꼭꼭 숨어서 나오질 못한다

 

태어나서 소멸하는 자연의 법칙

나는 지금쯤 어디에 왔을까

모든 게 멈추어 내가 떠나는 날에

나 손 흔들며 떠나리라

 

사랑하는 그대들에게

그 동안 고마웠다고

빚진 게 많았다고

행복했노라고 손 흔들며 떠나리라

 

 

추월 금지

 

모든 것은 변한다

흐름과 같이 호흡하며

이룰 수 없음을 안다

 

바쁘더라도

추월하지는 말자

흐름보다 앞서가려는 것은

자연에의 도전이다

 

차례를 기다리자

늘어선 줄에 짜증을 내지 말고

참고 기다림도 시간 아끼는 일

 

얼마나 남았을까만

건너뛰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밟고 가는 길을

눈이 내려 먼저 간 발자국을 지운다

 

 

이별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을 느끼며

찬바람 불고 눈발이 내리던 날

고스란히 당신의 흔적들 남긴 채

 

잡은 손을 놓고 떠나는 그대

시간의 깊이를 알 수 없지만

지금 떠난다 하여 결코 섧지 않으리라

 

내 영혼 저 밝은 달이 되어

늘 그대를 비추어 보리라

달이 없는 밤에는 별이 되어

그대를 찾아보리라

 

어느 계절을 끼고

자연은 스스로 겉옷을 벗어던지고

영하의 추운 밤을 지나고 있을 때

 

낙엽이 바람에 날리어 가듯

오래 머물지 못하는 시간을 안고

허공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그대여

 

대흥사에서

 

대흥사 앞마당에 천년의 고요가

웅크리고 앉아 이끼 가득한 석등

두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는 돌사자

몇 겁을 넘어온 침묵 속에 고요가 가득하다

 

구름은 쉬지 않고

대흥사 하늘을 날고 있는데

마당 북쪽 우뚝 선 연리지 나무에는

사랑의 언약이라도 하러 찾아온 새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천년의 고요를 깨트리고 있다

 

몇 겁을 지나온 빛과 어둠은

밤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아침에 꽃잎마다 수정 같은 눈물이 맺혔을까

 

멀미

 

장애물이 없는 바다에도

울퉁불퉁 꼬부라진 길이 있다

미끄러지듯 매끄러운 수면 위로

달려드는 하얀 포말의 파도를 만나면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고

객실 안 승객은 스멀거리는 어지러움으로

초롱초롱 빛나던 눈동자가 가자미처럼

반쪽 눈을 감은 채 하얗게 질려간다

그 순간 낯선 사람도 한마음이다

고통을 참고 있노라면 어느새

혼절하는 그리움으로 부두에 땅을 밟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세상이나 만난 듯

고통은 까마득히 지우고 설레는 마음으로

서로 인사하며 헤어진다

 

동백꽃 전설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수없이 뒤집히는 세월을 달래며

그대를 기다리지만

그댄 오지 않고

혹한이 밀려드는 겨울 어느 날

면사포에 묻은 피가

영원히 이별하는 사랑의 유서가 되어

기다리다 가슴 후비며 떠난 이여!

 

고운 육체 내던지고

피멍 새기듯 동백 열매로 피어난 영혼

동박새 한 마리 짝을 찾아

한참이나 동백나무에 말없이 앉아 있다

푸드덕 날아갑니다

 

지는 꽃잎처럼

 

구름처럼 밀려왔다 흩어지며

내 안에 감춰둔 보물이라도 있듯이

찾아도 찾지 못하는 빛깔이 있다

 

그늘진 창가로 살며시 햇살이

찾아와 미소를 지어주던

노을처럼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

 

가슴 저린 이야기들

파도에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만

물끄러미 쳐다보며 할 말을 잃는다

 

이곳저곳 흔적을 남겨놓고

다 지우지 못하고 가는 어리석음

욕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그 시절들

 

절개와 지조로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면서

나를 지켜주었던 하늘과 땅에 감사하며

지는 꽃잎처럼 소리 없이 떠나려 한다

 

 

             * 강연익 두 번째 시집 지는 꽃잎처럼(그림과책, 2020)에서

             * 사진 : 마삭줄. 지는 이미지의 꽃을 올려야 하는데, 요즘 그런 꽃은 마삭줄 정도여서 어쩔 수 없이

                        마삭줄 꽃으로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