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뭍에 돛을 내리고 어언 등단 10여 년 돌아보니 인생의 사계절을 운명처럼 맞이하면서 이제 한 자락 노을빛에 물들어 갑니다.
줄달음쳐 달려온 인생길에 발버둥치던 흔적들이 삶의 애환 속에서 샘솟는 자아의 모습, 이제 다 묻혀 버리기에는 너무 아쉬워 넉넉한 마음으로 기쁨이 되기를 바라며 위안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먼 길 돌아온 것 같지만 돌고 돌아 제자리 찾아오는 이 자리에 서서 내가 낸 길을 성큼성큼 걸어온 나를 뒤돌아보며 혼자서 살 수 없듯이 나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이곳까지 동행하게 된 수많은 은혜로운 자연과 주위에서 도움을 주던 이웃에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한생 살아온 그림자가 바람에 지는 꽃잎처럼 사라질 자연의 법칙에 소리 죽여 내 영혼의 소리를 낙엽에 새겨 바람에 떠밀어 보냅니다.
2020년 5월
은암 강연익
♧ 이별 연습
어둠을 끝내고
아침 해가 떠서 가는 시간
머물다 다가서는 노을에 묻혀
소멸해가는 내 모습을 본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보낸 시간
머물다 세월에 묻혀버린
그림자 없는 내 모습을 본다
하루를 끝내고 찾아오는 어둠 속에서
그 때의 고통과 기쁨과 슬픔이
내 안에 꼭꼭 숨어서 나오질 못한다
태어나서 소멸하는 자연의 법칙
나는 지금쯤 어디에 왔을까
모든 게 멈추어 내가 떠나는 날에
나 손 흔들며 떠나리라
사랑하는 그대들에게
그 동안 고마웠다고
빚진 게 많았다고
행복했노라고 손 흔들며 떠나리라
♧ 추월 금지
모든 것은 변한다
흐름과 같이 호흡하며
이룰 수 없음을 안다
바쁘더라도
추월하지는 말자
흐름보다 앞서가려는 것은
자연에의 도전이다
차례를 기다리자
늘어선 줄에 짜증을 내지 말고
참고 기다림도 시간 아끼는 일
얼마나 남았을까만
건너뛰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밟고 가는 길을
눈이 내려 먼저 간 발자국을 지운다
♧ 이별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을 느끼며
찬바람 불고 눈발이 내리던 날
고스란히 당신의 흔적들 남긴 채
잡은 손을 놓고 떠나는 그대
시간의 깊이를 알 수 없지만
지금 떠난다 하여 결코 섧지 않으리라
내 영혼 저 밝은 달이 되어
늘 그대를 비추어 보리라
달이 없는 밤에는 별이 되어
그대를 찾아보리라
어느 계절을 끼고
자연은 스스로 겉옷을 벗어던지고
영하의 추운 밤을 지나고 있을 때
낙엽이 바람에 날리어 가듯
오래 머물지 못하는 시간을 안고
허공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그대여
♧ 대흥사에서
대흥사 앞마당에 천년의 고요가
웅크리고 앉아 이끼 가득한 석등
두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는 돌사자
몇 겁을 넘어온 침묵 속에 고요가 가득하다
구름은 쉬지 않고
대흥사 하늘을 날고 있는데
마당 북쪽 우뚝 선 연리지 나무에는
사랑의 언약이라도 하러 찾아온 새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천년의 고요를 깨트리고 있다
몇 겁을 지나온 빛과 어둠은
밤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아침에 꽃잎마다 수정 같은 눈물이 맺혔을까
♧ 멀미
장애물이 없는 바다에도
울퉁불퉁 꼬부라진 길이 있다
미끄러지듯 매끄러운 수면 위로
달려드는 하얀 포말의 파도를 만나면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고
객실 안 승객은 스멀거리는 어지러움으로
초롱초롱 빛나던 눈동자가 가자미처럼
반쪽 눈을 감은 채 하얗게 질려간다
그 순간 낯선 사람도 한마음이다
고통을 참고 있노라면 어느새
혼절하는 그리움으로 부두에 땅을 밟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세상이나 만난 듯
고통은 까마득히 지우고 설레는 마음으로
서로 인사하며 헤어진다
♧ 동백꽃 전설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수없이 뒤집히는 세월을 달래며
그대를 기다리지만
그댄 오지 않고
혹한이 밀려드는 겨울 어느 날
면사포에 묻은 피가
영원히 이별하는 사랑의 유서가 되어
기다리다 가슴 후비며 떠난 이여!
고운 육체 내던지고
피멍 새기듯 동백 열매로 피어난 영혼
동박새 한 마리 짝을 찾아
한참이나 동백나무에 말없이 앉아 있다
푸드덕 날아갑니다
♧ 지는 꽃잎처럼
구름처럼 밀려왔다 흩어지며
내 안에 감춰둔 보물이라도 있듯이
찾아도 찾지 못하는 빛깔이 있다
그늘진 창가로 살며시 햇살이
찾아와 미소를 지어주던
노을처럼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
가슴 저린 이야기들
파도에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만
물끄러미 쳐다보며 할 말을 잃는다
이곳저곳 흔적을 남겨놓고
다 지우지 못하고 가는 어리석음
욕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그 시절들
절개와 지조로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면서
나를 지켜주었던 하늘과 땅에 감사하며
지는 꽃잎처럼 소리 없이 떠나려 한다
* 강연익 두 번째 시집 『지는 꽃잎처럼』(그림과책, 2020)에서
* 사진 : 마삭줄. 지는 이미지의 꽃을 올려야 하는데, 요즘 그런 꽃은 마삭줄 정도여서 어쩔 수 없이
마삭줄 꽃으로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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