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정군칠 시인이 생각나는 오후

김창집 2020. 7. 7. 17:16

조문 다녀오는 길에

'정군칠 시인 8주기'라는 밴드 글을 보고는

그가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는 걸 새삼 깨달으며

안타까움에 생전의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날씨마저 여름 같지 않게 어둑하고

비까지 추적거려 분위기가 더욱 쓸쓸하다.

 

그의 날카로운 시 정신과 시에 대한 정성은

몇 안 되는 그의 시 제자들에 의해

면면히 이어졌으면 좋겠다.

 

서늘한 정신

 

천 길 물길을 따라온 바람이 서느러워

바닷가에 나와 보네

앙상한 어깨뼈를 툭 치는 바람은

저 백두대간의 구릉을 에돌아

푸른 힘 간직한 탄화목을 쓰다듬고

회색잎 깔깔거리는 이깔나무 숲을 지나

황해벌판을 떠메고 온 전령이려니

지난날, 그대

비 갈기는 날의 피뢰침처럼 시퍼렇게 날이 서서는

혀를 감춘 하늘을 물어뜯어

만경들의 물꼬들을 차례차례 깨우고

나지막한 산을 넘을 때

누렁쇠 쇠울음으로 회오리도 쳤을 터

그대는 지나는 풀밭

풀자락들은 흔들려 불꽃으로 일고

그 불길이 몰려오는 섬 기슭에서

나 오늘, 서늘한 정신 하나를 보네

 

베릿내의 숨비기꽃

 

물총새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

베릿내에는

고향 뜨며 거둘 새 없던 숨비기꽃 겨우 몇 포기

바다마을을 지킨다.

이 척박한 바위틈에 어머니의 숨비소리 꽃으로 타올라 있다.

제기랄.

지금은 어머니 산소 다녀오는 길

어깨 늘어진 숨비기꽃도 함께 다녀오는 길

봉분의 흙 한줌 가져와 꽃부리 덮어주면

어느새 내 등에 얹혀오는 따뜻한 손이 있다.

 

사라호 태풍이 일던 아침 물이 불어나고

내를 거슬러 오르던 은어 떼들로

갈대들의 사타구니는 오싹오싹 긴장을 하고

마을을 에워싼 숨비기꽃은 바람을

잘도 막아 주었다.

다시 태풍이 불었다.

그 이름 없는 태풍에는 희한하게도 물이 줄어들었다.

은어 떼는 흙탕물에 방향을 잃고

갈대들은 몸 추스릴 새도 없이 흙더미에 묻히고

숨비기꽃은 이파리 찢기며 나팔을 불어댔지만

자갈을 퍼 올리는 중장비의 굉음에 묻히고 말았다.

바삐 도망치는 게 한 마리

게 한 마리처럼 집을 빠져 나오는 사람들을 보며

그게 칭원하여 바다는 거품을 물었다.

 

아득도 하여라

강산은 일 년만에도 변하여 그 일년이 스무 번을 넘겼고

누이의 젖살 같은 베릿내에는

방황의 냇둑을 굽이 안고 돌아

숨비기꽃의 낭자한 상처를 아물리고 있다.

 

, 견뎌내다

 

  밤을 달려 너를 만나고 온 아침,

  죽은 나방의 흔적을 지운다.

 

  밤길은 끝이 보이지 않고, 차창에 매달린 바람은 날 선 칼끝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너를 향한 한 가닥 그리움, 전조등은 어둠의 내장을 가르며 너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속도계의 바늘 속으로 나방이 달겨들었다. 가차 없이,

 

  凹凸 부분의 길을 지날 때 밑도 끝도 없이 굽이지던 삶이 출렁거렸다. 길의 권태가 끝나는 곳마다 가드레일은 계율처럼 웅크려 터무니없는 흥정을 요구해 왔다. 그때마다 가늠해야 할 방향이 무너져 내렸다. 때론 바튼 숨결을 헐떡이며 끌려가기도 했다. 직선을 고집하는 불빛을 좇아 아득한 어둠 속에서 뛰어들던 나방, 세상의 암유리를 들이받고 싶다는 생각, 생각은 항상 착시현상 속에서 조각났다.

 

  몽유의 밤이 끝나고 대적의 아침이 밝아올 때, 으깨어진 몸통이 쓸려나간 자리에 달라붙어 있는 몇 개의 까만 점. , 죽어가며 슬어놓은 나방의 알은 아닐까. 고치 속처럼 안전지대에 들어앉은 알들이 내 몸 속에서 꿈틀거린다. 무섭게 견뎌내고 있다.

 

무릎 꿇은 나무

 

모슬포 바닷가, 검은 모래밭.

서쪽으로 몸 기운 소나무들이 있다

매서운 바람과 센 물살에도 속수무책인 나무들

오금 저리는 앉은뱅이의 생을 견딘다

저 록키산맥의 수목 한계선

생존을 위해 무릎 꿇은 나무들도

혹한이 스며든 관절의 마디들을 다스린다

곧 튕겨져 나갈 것처럼 한쪽으로 당겨진 나이테의 시간들이

공명의 가장 깊은 바이올린으로 다시 태어난다

곧게 자라지 못하는 나무들의 뼈,

그 흰 뼈의 깊은 품이

세상의 죄스러운 것들을 더욱 죄스럽게 한다

 

광명사의 새벽

 

낡을 대로 낡아 더욱 가벼워지는

법당의 계단, 몸을 기댄다

간밤 별들을 가슴으로 안은 망초꽃들이

더러 마음 주어 나를 처다본다

나도 이슬로나 피어 어머니의 가리마에 내려앉고 싶다

볼을 어루만지는 바람결 따라

적막 속 영단으로 걸음을 옮길 때

홀연한 나비 한 마리,

어머니 하얀 치마가 펄럭인다

나 어린 배꼽의 때를 씻어내던

유백색 흔적 없는 자리

인간의 새벽뿐인 그 자리로

나비 한 마리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