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머리에
사람의 삶은 한가지이나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삶의 방식과 그 흔적은 정말로 다를 수도 있다.
아주 어린 시절, 제주도(濟州道)가 섬[島]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던 대여섯 살 즈음부터, 제주섬 토박이인 나의 아버지 언어 습관을 차마 이해하지 못하여 눈치 없이 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제주섬에 태어난 죄’라고 할 때 아버지의 온몸에서 풍기던 그 슬프고도 체념어린 처절한 원죄의식(原罪意識 ; original sin consciousness)은 뭐란 말인가?
나를 포함한 ‘제주 섬사람’을 이해하는 데는 한참 긴 시간, 어쩌면 나의 온 생애가 필요했다.
누군들 그러하지 않을까. 자신의 태생적 삶을 반추할 때에 비로소 인생의 역사가 새겨진 기록지(記錄地; recording-land)는 어딘지를 가늠하게 하는 그…….
♧ 책에 실은 열두 가지 이야기
* 그 허벅을 게무로사/ 그 허벅을 아무려면
* 찰나 앞에서
* 메께라! 지슬이?/ 뭐라고! 감자가?
* 구감이 게난/ 묵은 고구마가 그러니까
* 보리개역에 원수져신가 몰라도/ 보리미숫가루에 원수(怨讎)졌는지 몰라도
* 돗걸름이 제주섬에 엇어시민/ 돼지거름(돼지우리의 밑거름)이 제주섬에 없었다면
* 평지ㄴ.ㅁ.ㄹ이 지름ㄴ.ㅁ.ㄹ인거 세상이 다 알지 못헤신가?/ 평지나물이 기름나물인 걸 세상이 다 알지 못했을까?
* 하늘에 오른 테우리/ 하늘에 오른 목자(牧者)
* 털엉 구둠 안 나는 사름은 보지 맙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보지 마세요
* 곱을락을 헷수다마는/ 숨바꼭질은 했습니다마는
♧ 보리개역에 원수져신가 몰라도
* 4. 3 중, 쫓기는 아들에게 시원한 보리개역 한 모금 못 먹인 게 한(恨)이 되어 아들을 따라 폭포에서 떨어져 장렬하게 산화하는 내용을 그린 이 작품의 끝 부분을 본다.
--바로 그때였다. 아! 거짓말 같은 일이 눈앞에 벌어졌다.
저 폭포 꼭대기에 세워졌던 사람들이 나풀나풀 나비처럼,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물보라에 싸여 떨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폭포 소리에 어우러졌지만 아들 목소리였다. 어멍…!
“아이고, 아들아. 내 아들 어디 있….”
나는 나비처럼 날다가 꽃잎처럼 떨어지는 폭포 속의 사람들을 향하여 내달렸다.
아들아….
쾅쾅 소리 지르며 떨어지는 폭포를 향해 돌진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뒤에서 힘껏 내 등짝을 누군가가 발로 찼다. 내 몸뚱이는 가속도가 더해져 폭포로 냅다 내던져졌고 바로 그 찰나, 폭포수와 함께 떨어진 사람이 정통으로 내 정수리를 덮쳤다.
나는 깊은 물속으로 빨려들면서도 아들을 찾았다.
아들과 나는 동시에 손을 뻗었다. 맞잡았다.
아, 아슴아슴 정신 줄을 놓으면서도 그 찰나에 잡은 아들과 나의 손이 영원을 사를 것이란 걸 알았다. 돌이킬 수 없는.
어미가 되고서 아들 입에 시원한 개역 한 모금 먹이지 못한 게 한으로 가슴에 맺히지만 어찌하랴.*
*한림화 소설집『The Islander』(한그루, 202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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