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오래도록 그 곳에 있었으니
더 맑아지리라.
흐르지 못한 시간을 애써 변명하며
내 안에 무엇이 쌓이는 게 있으리라
막연한 기대를 놓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래도록 머물러있다는 것은
주변에
그만큼의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달아야만 했다.
오래된 골목에도
꽃은 피고
소실점 속으로 사라진 것들의 행방을
마음에서 찾는다.
어느새
한 점 점이 된
나.
♧ 골목의 봄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직선의 도로 날에 잘려 나간 마을 안쪽
윤색된
기억의 빛깔은
늘 찬란한 봄이었다
생애의 비밀 문자 주름살로 위장하고
자벌레 걸음으로 시간의 경계를 넘는
할머니 뒷모습에도 나른함이 따르고
여기서 거기까지
몇 생을 돌아야 할까
작아지던 골목이 한 점 점이 될 때
터질까
사라져버릴까
꽃망울 만개한 봄.
♧ 너울성 파도
바람 불지 않아도 파도는 높았다
태풍 예보만으로도 꽃잎을 오므리며
갯바위
갯메꽃들이
파르르르 버티고
선심성 입김에도 입장 바꾼 기압골
회전교차로 도는 동안 방향을 또 잃었나
막아선
현수막들이
갈기갈기 찢기고
태풍의 눈동자가 정수리를 노릴지 몰라
비껴간 경로에도 불안한 하늘의 뜻
신산리
앞괴 바다가
경계선을 긋고 있다
♧ 산수국 피는 길
초신성 푸른 별이
안개 속에 떠있다
전설의 끝을 푼 백록의 숨결들이
하얗게 숲을 지우고
빈 세상을 내밀 때
허리둘레 넉넉한
헛꽃들만 봤었지
쉽게 젖고 쉽게 마르는 이 얇은 가슴으로는
잉태의 작은 방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돌발사고 영상처럼
맞닥뜨린 지천명
그래프 꺾인 지점 성판악 넘어선 길
촉촉한 눈빛을 보내는
산수국이 있었다.
♧ 수월봉 바람맞이
무너지다 남은 것들은
절벽이 되었다
부재의 품 안으로 파고들던 바다의 등
그 등을 밟고 오르는
바람이 매서웠다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도리 없다 하지 마라
바닥까지 굽히고서도 깍지를 낀 억새 뿌리
통째로 산이 되었다
수월봉이 울었다
♧ 2016, 수선화
습관처럼 내뱉는 모른다 그 대답에
일 퍼센트 기대마저 손을 놓는 이 겨울
바닥이 바닥을 보이며 벌거벗고 있을 때
무리지어 피는 꽃은 쉽게 꺾이지 않더라
바람 부는 쪽으로 촛불을 켠 수선화
이 겨울 다 지나도록 일렁이고 있었다.
* 시 : 김연미 시조집『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천년의시조 1008, 2020)에서
* 사진 : 포토샵 수채화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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