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연미 시조집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발간

김창집 2020. 7. 11. 13:30

시인의 말

 

 

오래도록 그 곳에 있었으니

더 맑아지리라.

 

흐르지 못한 시간을 애써 변명하며

내 안에 무엇이 쌓이는 게 있으리라

막연한 기대를 놓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래도록 머물러있다는 것은

주변에

그만큼의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달아야만 했다.

 

오래된 골목에도

꽃은 피고

소실점 속으로 사라진 것들의 행방을

마음에서 찾는다.

 

어느새

한 점 점이 된

.

 

골목의 봄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직선의 도로 날에 잘려 나간 마을 안쪽

 

윤색된

기억의 빛깔은

늘 찬란한 봄이었다

 

생애의 비밀 문자 주름살로 위장하고

자벌레 걸음으로 시간의 경계를 넘는

할머니 뒷모습에도 나른함이 따르고

 

여기서 거기까지

몇 생을 돌아야 할까

작아지던 골목이 한 점 점이 될 때

 

터질까

사라져버릴까

꽃망울 만개한 봄.

 

너울성 파도

 

 

바람 불지 않아도 파도는 높았다

태풍 예보만으로도 꽃잎을 오므리며

갯바위

갯메꽃들이

파르르르 버티고

 

선심성 입김에도 입장 바꾼 기압골

회전교차로 도는 동안 방향을 또 잃었나

막아선

현수막들이

갈기갈기 찢기고

 

태풍의 눈동자가 정수리를 노릴지 몰라

비껴간 경로에도 불안한 하늘의 뜻

신산리

앞괴 바다가

경계선을 긋고 있다

 

산수국 피는 길

 

 

초신성 푸른 별이

안개 속에 떠있다

 

전설의 끝을 푼 백록의 숨결들이

하얗게 숲을 지우고

빈 세상을 내밀 때

 

허리둘레 넉넉한

헛꽃들만 봤었지

 

쉽게 젖고 쉽게 마르는 이 얇은 가슴으로는

잉태의 작은 방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돌발사고 영상처럼

맞닥뜨린 지천명

 

그래프 꺾인 지점 성판악 넘어선 길

촉촉한 눈빛을 보내는

산수국이 있었다.

 

수월봉 바람맞이

 

 

무너지다 남은 것들은

절벽이 되었다

 

부재의 품 안으로 파고들던 바다의 등

 

그 등을 밟고 오르는

바람이 매서웠다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도리 없다 하지 마라

 

바닥까지 굽히고서도 깍지를 낀 억새 뿌리

 

통째로 산이 되었다

 

수월봉이 울었다

 

2016, 수선화

 

 

습관처럼 내뱉는 모른다 그 대답에

 

일 퍼센트 기대마저 손을 놓는 이 겨울

 

바닥이 바닥을 보이며 벌거벗고 있을 때

 

무리지어 피는 꽃은 쉽게 꺾이지 않더라

 

바람 부는 쪽으로 촛불을 켠 수선화

 

이 겨울 다 지나도록 일렁이고 있었다.

 

 

                  * : 김연미 시조집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천년의시조 1008, 2020)에서

                  * 사진 : 포토샵 수채화 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