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안상학의 시 '기와 까치구멍집'

김창집 2020. 9. 16. 16:47

기와 까치구멍집 - 안상학

 

 내가 한 일은 다만

 1948년 그 사내가 안동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

 

 제주 도민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 지휘관을 암살한,

 국군이 국민에게 결코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던

 대한민국 제1호 사형수 문상길 중위

 고향이 어디인지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향년 스물셋 사내, 고향은 안동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의 내력을 찾아낸 것

 

 임하댐 수몰된 안동 마령리 이식골

 남평 문씨 종갓집 막내아들, 그 사내가 살던 곳

 그 사내가 떠난 곳,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곳

 사내처럼 사라진 마을, 흉흉한 소문 떠도는

 쉬쉬대며 살아온 일가붙이들 산기슭에 남은 곳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의 사진 몇 장 찾은 것

 

 소년처럼 해맑은 사내의 마지막 웃음

 두 손 철사로 묶인 채 나무 기둥에 결박당한 몸

 가슴에는 휘장 대신 표적, 흑백사진 붉은 피는

 두 눈 가린 채 목이 꺾인 사내의 최후 진술;

 내 비록 미군정 인간의 법정에서는 사형을 받고 사라지나

 공평한 하늘나라 법정에 먼저 가서 기다릴 것이다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가 살던 집을 찾아낸 것

 

 당당하게 살아남은 그 사내의 흔적

 300년 문화재 기와 까치구멍집 건재한 사내의 생가

 수몰을 피해 남후면 검암리로 옮겨 앉은 남평 문씨 종가

 그를 기다린 40년 고향을 뒤로하고

 1988년 옮겨 앉은 낮선 땅 32, 기다리고 기다린

 72년 만에야 불귀 주인 소식 전해들은 까치구멍집

 

 무자년 사내가 가고 72년 만에 내가 한 일은 다만 그의 흔적을 찾은 것일 뿐, 고작 대문간에 막걸리 한잔 올리고 그의 죽음을 전하는 일이었을 뿐, 그 사이 하늘나라 법정에서 받아놓았을 그 사내의 판결문을 이 집 우체통에 전해주는 일은 그날 이후 남겨진 모든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며 음복주를 마셨다. 경자년 경칩 무렵, 복수초가 까치구멍집 화단에 피어 있는 날이었다.

 

                                *시 : 제주작가 2020 여름호(통권 69)에서

                                 *사진 : 해오라비난초

 

 ♧ 문상길(미상 1948923)은 제주 4·3 사건을 지휘한 박진경 장본인을 암살한 광복 직후의 11연대 제3중대장 중위였다. 박진경 암살 사건을 주도하였으며, 수사 결과 남로당원인 그를 포함해 신상우 일등중사, 손선호 하사, 배경용 하사가 사형을 선고받았고, 923일 총살당했다. (위키백과)

 이 시는 그 동안 미궁에 있던 문상길이 안동 사람이라는 걸 밝혀내고 그의 본가인 기와 까치구멍집을 찾아 행한 내용으로 보인다. '까치구멍집'은 안동시에 있는 민가의 한 형태로 지붕 용마루 아래 박공 부분에 구멍을 낸 집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