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와 까치구멍집 - 안상학
내가 한 일은 다만
1948년 그 사내가 안동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
제주 도민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 지휘관을 암살한,
국군이 국민에게 결코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던
대한민국 제1호 사형수 문상길 중위
고향이 어디인지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향년 스물셋 사내, 고향은 안동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의 내력을 찾아낸 것
임하댐 수몰된 안동 마령리 이식골
남평 문씨 종갓집 막내아들, 그 사내가 살던 곳
그 사내가 떠난 곳,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곳
사내처럼 사라진 마을, 흉흉한 소문 떠도는
쉬쉬대며 살아온 일가붙이들 산기슭에 남은 곳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의 사진 몇 장 찾은 것
소년처럼 해맑은 사내의 마지막 웃음
두 손 철사로 묶인 채 나무 기둥에 결박당한 몸
가슴에는 휘장 대신 표적, 흑백사진 붉은 피는
두 눈 가린 채 목이 꺾인 사내의 최후 진술;
내 비록 미군정 인간의 법정에서는 사형을 받고 사라지나
공평한 하늘나라 법정에 먼저 가서 기다릴 것이다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가 살던 집을 찾아낸 것
당당하게 살아남은 그 사내의 흔적
300년 문화재 기와 까치구멍집 건재한 사내의 생가
수몰을 피해 남후면 검암리로 옮겨 앉은 남평 문씨 종가
그를 기다린 40년 고향을 뒤로하고
1988년 옮겨 앉은 낮선 땅 32년, 기다리고 기다린
72년 만에야 불귀 주인 소식 전해들은 까치구멍집
무자년 사내가 가고 72년 만에 내가 한 일은 다만 그의 흔적을 찾은 것일 뿐, 고작 대문간에 막걸리 한잔 올리고 그의 죽음을 전하는 일이었을 뿐, 그 사이 하늘나라 법정에서 받아놓았을 그 사내의 판결문을 이 집 우체통에 전해주는 일은 그날 이후 남겨진 모든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며 음복주를 마셨다. 경자년 경칩 무렵, 복수초가 까치구멍집 화단에 피어 있는 날이었다.
*시 : 제주작가 2020 여름호(통권 69호)에서
*사진 : 해오라비난초
♧ 문상길(미상 〜 1948년 9월 23일)은 제주 4·3 사건을 지휘한 박진경 장본인을 암살한 광복 직후의 11연대 제3중대장 중위였다. 박진경 암살 사건을 주도하였으며, 수사 결과 남로당원인 그를 포함해 신상우 일등중사, 손선호 하사, 배경용 하사가 사형을 선고받았고, 9월 23일 총살당했다. (위키백과)
이 시는 그 동안 미궁에 있던 문상길이 안동 사람이라는 걸 밝혀내고 그의 본가인 기와 까치구멍집을 찾아 행한 내용으로 보인다. '까치구멍집'은 안동시에 있는 민가의 한 형태로 지붕 용마루 아래 박공 부분에 구멍을 낸 집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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