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문(諮問) - 임보
아내가 마트에서 산 물건들이
집에 배달되었다
배달된 상품들을 확인하던 아내가
식용유가 한 병 더 왔다며
어떻게 해야 할까를 내게 묻는다
“돌려줘야지!”
무심코 내가 대답했다
그런데, 아내는 2층에 올라가
딸에게 다시 자문을 구한 뒤
내려오더니
“그냥 두라는데?”
딸의 대답을 전한다
권사님 생각도 딸과 다르지 않는 걸
괜히 내가 번거롭게만 한 것 같다.
♧ 풀꽃으로 피어나라 - 정순영
아침마다 여명(黎明)이 어둠을 해치고
해맑은 꽃으로 피어나라
깨우신다.
더 낮은 곳으로
더 쓸쓸하고 외로운 곳으로
그곳 움츠린 사람들의 마음을 밝히는
영롱한 하늘이슬 머금은 풀꽃으로 피어나라 하신다.
♧ 米壽부부 - 김동호
안경 어디 두었는지
생각 안 날 때 “여보”
전화번호
생각 안 날 때도 “여보”
열쇠
잃어버렸을 때도 “여보”
이유 없이
흥이 날 때도 “여보”
88부부
“여보” 소리가 팔팔하네
♧ 고백 – 권순자
습한 바람이 불고
길 가던 나그네 바람에 젖는다
장미꽃잎과 가시를 살피고 가느라
헤쳐 가는 발이 이슬에 젖는다
한때는 세상을 거슬러 너에게 가노라
맘이 젖어 길을 맴돈 적이 있다
찢기고 피멍 든 시간이
오래 멍울져 장미처럼 붉었던 적이 있다
♧ 해질녘 - 옥수복
할머니는 아이의 하늘이었습니다.
그 하늘의 치맛자락을 놓지 않았던 아이를 데리고, 할머니께서 새참을 머리에 이고 마을길 지나 밭두렁 논두렁길을 버선발 고무신 차림으로 사뿐히 가시어 동구 밖 양지말 논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한 그릇 가득 국수를 말아주고, 막걸리도 한 대접씩 돌려주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의 일입니다.
한결 가벼워진 소쿠리로 밭에 들러 감자도 캐고, 파, 고추를 따시고선 아이가 좋아하는 잘 영근 옥수수를 골라 따서 아이의 손에 쥐어 주며, “아가, 집에 가서 할머니가 솥에 쪄 줄 거야. 잘 들고 가야한다.”고 나직이 말씀하셨는데, 따스하고 넉넉하고 그윽했던 할머니의 음성이 사랑 너머의 사랑으로 하늘 너머의 하늘을 돌아서, 아이의 영혼에 빛 부신 노을로 퍼졌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아스라이 그리운 그날입니다.
♧ 매미 그늘 – 김성중
제1번 나무 음나무
폭우와 강풍에 쓰러진
그 자리에 심은 후계목이
자라고 있다
바로 오른쪽에는
우람한 제2번 나무 푸조나무가
나처럼 속이 비었지만
당당하게 서 있다
관방제림은 앞으로도 주욱
뭇 사람들의 뻥 뚫린 허방을
가득 채워주는
시원한 나무 그늘이 되리라
△ 시 : 월간 『우리詩』 2020년 9월호(387호)에서
□ 사진 : 가을꽃들 - 순서대로 이질풀꽃 이고들빼기 한라돌쩌귀 흰진범 물매화 고마리 쑥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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