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9월호의 시와 가을들꽃

김창집 2020. 9. 9. 12:19

자문(諮問) - 임보

 

아내가 마트에서 산 물건들이

집에 배달되었다

 

배달된 상품들을 확인하던 아내가

식용유가 한 병 더 왔다며

어떻게 해야 할까를 내게 묻는다

 

돌려줘야지!”

무심코 내가 대답했다

 

그런데, 아내는 2층에 올라가

딸에게 다시 자문을 구한 뒤

내려오더니

 

그냥 두라는데?”

딸의 대답을 전한다

 

권사님 생각도 딸과 다르지 않는 걸

괜히 내가 번거롭게만 한 것 같다.

 

풀꽃으로 피어나라 - 정순영

 

아침마다 여명(黎明)이 어둠을 해치고

 

해맑은 꽃으로 피어나라

 

깨우신다.

 

더 낮은 곳으로

 

더 쓸쓸하고 외로운 곳으로

 

그곳 움츠린 사람들의 마음을 밝히는

 

영롱한 하늘이슬 머금은 풀꽃으로 피어나라 하신다.

 

米壽부부 - 김동호

 

안경 어디 두었는지

생각 안 날 때 여보

 

전화번호

생각 안 날 때도 여보

 

열쇠

잃어버렸을 때도 여보

 

이유 없이

흥이 날 때도 여보

 

88부부

여보소리가 팔팔하네

 

고백 권순자

 

습한 바람이 불고

길 가던 나그네 바람에 젖는다

 

장미꽃잎과 가시를 살피고 가느라

헤쳐 가는 발이 이슬에 젖는다

 

한때는 세상을 거슬러 너에게 가노라

맘이 젖어 길을 맴돈 적이 있다

 

찢기고 피멍 든 시간이

오래 멍울져 장미처럼 붉었던 적이 있다

 

해질녘 - 옥수복

 

  할머니는 아이의 하늘이었습니다.

  그 하늘의 치맛자락을 놓지 않았던 아이를 데리고, 할머니께서 새참을 머리에 이고 마을길 지나 밭두렁 논두렁길을 버선발 고무신 차림으로 사뿐히 가시어 동구 밖 양지말 논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한 그릇 가득 국수를 말아주고, 막걸리도 한 대접씩 돌려주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의 일입니다.

 

  한결 가벼워진 소쿠리로 밭에 들러 감자도 캐고, , 고추를 따시고선 아이가 좋아하는 잘 영근 옥수수를 골라 따서 아이의 손에 쥐어 주며, “아가, 집에 가서 할머니가 솥에 쪄 줄 거야. 잘 들고 가야한다.”고 나직이 말씀하셨는데, 따스하고 넉넉하고 그윽했던 할머니의 음성이 사랑 너머의 사랑으로 하늘 너머의 하늘을 돌아서, 아이의 영혼에 빛 부신 노을로 퍼졌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아스라이 그리운 그날입니다.

 

매미 그늘 김성중

 

1번 나무 음나무

폭우와 강풍에 쓰러진

그 자리에 심은 후계목이

자라고 있다

 

바로 오른쪽에는

우람한 제2번 나무 푸조나무가

나처럼 속이 비었지만

당당하게 서 있다

 

관방제림은 앞으로도 주욱

뭇 사람들의 뻥 뚫린 허방을

가득 채워주는

시원한 나무 그늘이 되리라

 

 

                   △ : 월간 우리20209월호(387)에서

                   □ 사진 : 가을꽃들 - 순서대로 이질풀꽃 이고들빼기 한라돌쩌귀 흰진범 물매화 고마리 쑥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