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 벗들과의 속삭임
내 주변의 벗들
한겨울 남사당패처럼 뿔뿔이
흩어졌다가도
생각의 문을 열어젖히면
스스럼없이
내 시작詩作 노트에게로 몰려든다.
어떤 벗들은
묵중하고 생경한 언어를 데려오고,
어떤 벗들은
사당패 벙거지꼭지 초라니처럼
가볍고 재미있는 모습으로 다가와,
이럴 때면 나는 벗들과
시공간을 뛰어 넘는
속삭임이 하염없이 이어진다.
외진 들녘에
속절없이 핀
들꽃 닮은 나의 벗들.
♧ 섬의 노래 – 김창화
가끔은 매우 쓸쓸한 얘기들
누구 집 팔순 어머니가
물속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소문이 들릴 때면,
삶은 오로지 물질밖에 모른
해녀로 살아온 질곡의 세월
젖둥이, 애기업개에게 업혀두고
물 때 맞춰
억척의 물질로 딸 아들 키워낸 어머니
성창둥이, 질둥이 얘기들도 먼 전설이 돼버린
그때나 지금이나 물너울에
섬 끝 가장자리서 한숨처럼
하늘로 솟구치는 숨비소리,
수백 년 자손대대 흘러내려온
눈시울 글썽이는
섬 바닷가에 흐르는 저 소리들
때로는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
고향해변에 갈 때면
옛 노랫소리가 되어
마치 오랜 친구가 나를 반기듯
지금도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
* 애기업개 :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맏이.
숨비소리 : 해녀가 자맥질 후 물 위에서 내 뿜는 날숨소리.
성창둥이 : 해녀가 물질하러 갔다가 선창에서 분만한 아이.
질둥이 : 물질하고 오다가 길에서 분만한 아이.
♧ 그림 닮던 옛 풍경은 - 김창화
가린돌 해변 길
아담한 단애가 병풍처럼 휘두른 갯가
단애자락 해변 길
바위틈새 메꽃의 연보라 빛
풀덤불 새 민들레 순노랑 빛에 현혹돼
나풀나풀 나풀대던 흰나비 날개에
여름바다 쪽빛이 반사되던……
일흔을 넘긴 이 여름에도 천진했던 시절이
햇살 튀는 물너울에
쪽빛으로 물들며 남실남실 떠다니네,
먼 바다 저녁놀이 단애를 감쌀 때면
황혼 물든 자욱한 저녁연기,
가을달빛의 코스모스 오솔길
은빛 내린 동그만 해변마을의 초가지붕들
마치 옛 얘기 속
오래된 그림과 같은 기억의 파노라마
조수처럼 밀려든 변화의 물결
옛 마을은 기억 속 아련한 흔적뿐
그렇지만 지금도 변함없는
모랫만의 물너울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림인 듯 다가오는
한담동의 옛 풍경에 마음을 주네.
--
*가린돌 해변 길 : 제주시 애월리 한담동 서쪽(곽지와 애월리 사잇길)
♧ 초라한 향수
윤삼월 들녘 저편
뻐꾸기 울음 뒤에
남풍 따라 풍겨오는 들판의 보리내음
그 옛날 포구, 정겨운 똑딱선 소리
훨씬 커버린 항구
돋아 솟는 아슴한 기억들이……
어디론가 가버린 정 깊던 사람들
낯선 얼굴들만
나는 바람이련가 이 시간 지나면
나 홀로
다시 또 내 삶의 그곳으로
흘러가야 할 고향 잃은 나그네.
♧ 가벼움으로
구만장천의 하늘에 여울지는
실구름 두둥실
지구의 중력도 아랑곳없는 가벼움
파란허공에 펼치다
가뭇없이 스러지는 실 비단 휘장
가식 없는 자유의 행로
폭염 가려주는
한줌의 응달엔
목마른 대지에
믿지 못할 약속이 흐르고
매미소리 솟치는 오후의 창공
내 마음 조각구름 되어 두둥실
가벼이 아주 가벼이
가없는 여행길 떠나고픈.
♧ 봄밤의 명상
가로수 잎 사이로 다정히 흐르는 밤
네온 등 휘황한 이 거리로 수많은 봄이
가고 오는 동안
어쩌면 나는 삶의 빛을 찾아 하염없이
퍼덕거렸던 불나비와도 닮은 삶이랄까
좋아할 일 좋아했고
슬퍼할 일 슬퍼했고
분노할 일 분노했던
인생무대에서 마지막 삶을 장식할
마무리 연기를 준비하는 배우처럼
아련한 그간의 시간들과
이제 몇%쯤 남은
생애를 가늠해 보는 밤
굳이 지탱해야할 것도 없는 지금
내 그림자는 네온 빛에 아롱지며
끝내 완성되지 못한 그림처럼
다정한 훈풍에 가없이 흔들리고 있다
-김창화 제4시집 『섬의 노래』(제주문화, 202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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