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가 너무 길어서일까
기다리던 책이 이제 도착했다.
이번 ‘우리詩’ 10월호는
깔끔한 새 장정에
권두시는 김수영의 ‘병풍’을 실었다.
27인의 신작시와
김정범의 <신작 소시집> ‘비키니 환상’외 9편까지
엄청난 시의 양이다.
임보 원로시인의 ‘나는 시를 이렇게 썼다’와
엄광용 작가의 ‘역사와 문학의 변주’를
재미있게 읽었다.
우선 시 몇 편을 골라
지난 주말에 다녀온 돌오름에서 찍은 사진을 싣는다.
단풍은 좀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 용암에게 - 洪海里
너는 물인가,
불인가?
너는 흘러내리는 불
젖은 불,
타는 물이다
사랑이여,
너도 내게 오거든
용암이 되거라
다 타고 나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
불이 아니라
죽으면
단단한 바위가 되는
물이 되어라
용암은 불이자
물이다.
♧ 겨울 왕나비 – 정옥임
길이 구겨졌거나
터무니없이 늘어났거나
너무 빨리 왔거나
터무니없이 느리게 왔거나
오른쪽으로 틀 걸
왼쪽으로 틀었거나
시간이 접혔거나
겨울이 당겨왔거나
고장난 계기판
아래로, 아래로 급하강
멀리 왔거나 잘못 와 버린 비행
가물가물 눈발 속
꿈속 무성한 여름 정원을 향하여
무거운 날개를 펼친다
♧ 바보 – 이규흥
환갑 나이에 이르러서도
나는 하늘 아래 혼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
사랑을 낳고
사랑을 키워냈지만
이 땅에 홀로 남은
나는 완전한 혼자입니다
너는 누구냐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찾아 그렇게 헤매고 있느냐
이런 사소한 물음조차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십갑자 처음으로 되돌아왔건만
정녕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바보일 뿐입니다
♧ 밥그릇 - 이주리
화장실에 가서 엉엉 울어본 적 있나요
창구에 앉아 하루에 백번의 슬픔을 받아요
슬픔은 너무 축축해
주기적으로 기저귀를 갈아주어야 해요
해풍에 그물 당기는 쪽으로만 손가락이 자란 아저씨
그 손가락 하나를 잃었을 때 밥그릇도 잃어
눈빛은 허공을 헤매고
목에는 절망이 가래 되어 끓어요
까짓거 뱉어내세요. 아저씨
아리아리 동동 스리스리 동동
대학생 하나, 중학생 하나, 초등학생이 둘,
그리고 기저귀가 필요한 노모가 있다구요
입 벌린 운동화 여섯 개가 장난이냐구요
회사가 받아먹은 지원금 때문에
해고를 해고라 불러주지도 않아
실업급여도 안되는 게 어느 나라 법이냐구요
분노가 방향을 잃어 저에게 박히죠
당신이 이런 젠장할 상황을 알기나 해?
씨팔, 나보고 어찌 살라고
아리아리 동동 스리스리 동동
나도 울고 싶어요. 아저씨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살아봐요
빈 밥그릇에 햇살이라도 담읍시다
♧ 외치고 싶다 - 박병대
에즈러파운드의 뼈를 딛고 방황하던 시절
모더니즘을 고민하며 보들레르와 말라르메를 마셨지
르네상스의 따뜻함을 밀쳐두고 관습과 전통과 종교에
반기의 깃발 휘날리며 아리에가르드를 추종하다가
죽어버린 것들을 찾아서 아방가르드를 끼고 다녔지
모더니즘이 파멸하고 내 영혼이 부서지고
포스트모더니즘이 부서진 영혼마저 짓밟았을 때
나는 또다시 아방가르드를 찾아야 했었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상징주의가 고전으로 묻혀
시대마다 활보했던 찬란한 것들이 퇴색하고
부서진 영혼 짓밟았던 포스트모더니즘도
미래파에 쫓겨 퇴색하였지
나는 다시 르네상스로 돌아가고 싶다
따뜻함으로 무한한 자유를 찾아서
아방가르드를 앞세우고 행진하고 싶다
끊임없는 개혁을 추종하며 외치고 싶다
아방가르드 만세
♧ 감자 - 최라라
우리는 나란히 썩어가기로 했다 거울을 보지 않고도 입이 사라졌음을 소리가 사라졌음을 냄새가 사라졌음을 알았다 눈이 사라지고 나서도 서로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심장이 사라지고 나서도 오랫동안 서로 두근거렸다 잡을 손이 없어지자 약속을 후회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라진 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썩어가기로 했다
-월간『우리詩』2020년 10월호(388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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