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2020년 10월호의 시(2)

김창집 2020. 10. 12. 11:44

온몸의 詩 - 洪海里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을 배우고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풍류風流를 익히네

 

푸른 초원을 찾아

누 떼는 악어의 강을 건너고

 

물고기를 잡으려고 물총새는

온몸을 물속으로 내리꽂는다.

 

대청봉에서의 하룻밤 전병호

 

밤 깊으면 눈보라도 잠을 잔다.

한밤중 대피소 밖으로 나와 보니

거짓말처럼 눈보라가 그쳤다.

손에 닿을 것 같은 하늘에는 별이 총총

발 아래 잠든 속초시내는 별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잠에 떨어진 이 밤

착각인 듯 고요하고 찬란한 세상이

창밖에서 펼쳐지고 있다니!

잠자리로 돌아온 나는 옆에 누운 동료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엔 아주 훌륭한 해맞이를 할 수 있을 거라고

귓속말로 속삭였지만

고단하게 잠든 그는 내 말을 알아들었을까.

 

어둠속에서 침낭 개고

서둘러 아침 지어 먹고

피켈 잡고 배낭 메고 등산화 끈 조이고

남보다 먼저 나가겠다고

대피소 문을 열었다.

 

이게 뭐야

문 밖에는 한 걸음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눈보라.

 

마스크 - 이인평

    -코로나19

 

제발 입 좀 닥치라고

말 좀 그만 하라고

그만큼 떠들었으면 됐다고

주둥이를 덮어버린 줄도 모르고

계속 떠든다

 

없었던 일도 있었던 것처럼

모함과 미움과 질투에 사로잡혀

가짜, 거짓에 길들여진 입들을

마스크로 덮어도 멈출 줄 모른다

 

말을 하면 할수록

모든 게 엉망진창인 줄 알면서도

지껄이면 지껄일수록

형편없는 공해일 줄 알면서도

자꾸 떠들어 댄다

 

하얗게 침묵하라고

아니, 까맣게 잊어버리라고

주둥이를 막아버린 줄도 모르고

 

엄지손가락만한 세상 - 오영자

 

나를 향해 흘러나오는 가늘고 긴 끈

어느 틈에선가 틈을 비집고 나를 향해 달려온다.

시간의 소리들이 나의 귓속에 쳇바퀴처럼 돌고

수없이 많은 이명 속으로 사라지는 저음

 

뱉어 놓은 수많은 언어들이 종이처럼 구겨지고

어느 세상의 틈을 비집고 새어 나왔는지

어디쯤에서 단번에 나를 알고 달려 나온 것인지

 

이 혼선의 삶속에서

다른 세상을 걸어 다니는 말들의 세상

그 속을 들여다보는 일에 눈 따위는 없다.

열두 개의 버튼으로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들여다보며

숨어 있는 수많은 얼굴들이 혼선이 되지 않은 채

또박또박 나를 향해 걸어 나오고

내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말들도 서둘러 대답을 한다.

 

귀로만 볼 수 있는 세상

통화버튼 속의 수많은 얼굴들을

엄지손가락 하나로 조용히 열어보는 세상

걸음으로 걸을 수 없는 길이 이렇게나 많이 있었다니

 

물방울 - 장동빈

 

긴 장마에 젖어 들어가

물방울이 되었다

 

완력에 갇힌 팽창

피할 수 없는 빛의 산란

 

막을 찢고 나오지 못해

바닥과 일치될 수 없는 운명

 

세상이 흔들릴 때마다

균형 잃는 마음

 

구르고 굴러

세상의 끝에서 끝으로

중력에 몸을 맡기고 날아올라

 

바닥에 부딪혀

임계점을 넘는 순간

또 다른 자신을 만들고

 

마주한 바닥들에 기생하며

채워가는 결핍

 

토성의 고리 - 김정범

 

태양계가 물결친다

빨간 꽃,

프레스코 천장 아래 우주 속으로 떨어진다

 

검은 물질은

회오리치는 울음을 받아

가까운 별의 안테나로 타전한다

달 가까이 흘러내리는

사별의 먼지 파도는

노란 토성에 공명하며 울린다

 

총에 맞은 태양계가 다시 흔들린다

피 흘리는 어린 떨기 꽃들

 

아무도 모르게

그림에 먼지가 쌓이며 색이 지워진다

노란 고리가 뒤틀린다

 

얼음 고리들은

제각기 소리를 내며 돌다가

개미 같은 파란 점에

가장 고요한 눈을 뿌린다

 

우리는 아무 데도 없고

모든 곳에 있다

 

 

                                         *: 월간우리202010월호(통권388)에서

                                                 *사진 : 요즘 한창 피어나는 물봉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