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10월호의 시(3)

김창집 2020. 10. 18. 12:49

등을 읽다 - 임미리

 

누대의 천 냥 빚을 갚고 멋진 하루를 샀다.

그 하루, 보낼 곳을 찾아 산천을 헤매다

오랜 세월 버티고 살아 화석이 된

천연기념물 야사리 은행나무 아래서

숨을 고르고 가만히 나무를 올려다본다.

수많은 은행잎이 일제히 등을 보여준다.

그동안 윤기 나는 앞만 보았는데

뒤를 보는 일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은행잎의 등은 사람의 등처럼 제각각이다.

방치된 등을 들여다보는 일이란

마음에 저울이 있어 휘청거리는 일이다.

사람의 등에서는 수많은 언어가 난무한다.

그 속에서 읽히는 마음의 무게는 밸런스가 없다.

읽었으나 해석하지 못한 등은 오래 기억된다.

아직은 짙푸른 잎 사이에 정적이 감돈다.

 

갠지스강의 축제 한경

 

무심하게 흐르는 흙빛 갠지스강물

 

꽃잎처럼 작은 아기

흰 옥양목 천에 둘둘 감아 띄우며

젊은 아빠의 흔들리는 눈빛

강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

 

강둑 여기저기

장작더미에 활활 타는

생명의 겉껍질들

 

높낮이가 다른 탑의 높이

죽음의 강에서도 건너지 못하는 가난

 

누가 불꽃과 연기의 축제라고 했던가

 

흙빛 강물에 가라앉는

비릿한 주검의 냄새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이승을 붙들고 흐느끼네

 

강물에 피어오른 꽃등들

가물가물 멀어져가는 한 생애

 

요란한 폭죽, 군중의 숨소리에

하늘 끝까지 빨갛게 물드는 강

 

토르소 권기만

 

광기 우수함

슬픔 맑음 사랑에 덴 흉터 있음

웃음 퍼 올리는 미소 쓸만함

감동 한 토막 깎아 만든 비수 지녔음

침묵으로 채운 모유의 질량엔

달의 오르가즘이 살고 있다함

일만 년 동안 바람으로 그린 입술과

딸랑 언어 절망 과징금 넣어둘

울음 주머니도 있음

백만 년 동안 꿈이 두른

물 허리도 있다 함

이런 자아를 찾으신 분은

막막한 한 줄기 외길

가슴으로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신발 - 장동빈

 

길을 가다

버려진 신발을 만났다

 

신발이 필요 없어진 걸까

낡아서 버린 것일까

집을 들어갈 때처럼

뒤꿈치로 눌러 벗어

다소곳이 놓인 모양이 신경 쓰인다

 

시간의 중력을 이기지 못해

높은 과거로 떨어져 버린

첫 만남은 분명 설렘으로 시작되었으리라

 

이젠 다른 표정을 만들 수 없는

따듯한 손길을 잃은 신발 끈

 

뚜벅뚜벅 걷는 꿈을 꾸고 있을까

발등 덮개 눈꺼풀이 파닥거린다

 

고단할 것 같은 걸음들을 되새기며

마음이 신발을 신고

같이했던 비와

같이했던 눈과

같이했던 자갈길

같이했던 포장길

아름다웠던 주변 풍경들을 느끼며 걷고 있다

 

맨발로 걸어가던 마음이 신발을 신고 웃는다

 

부작위 - 이령

 

창밖, 비조차 기립박살이 나는 아침,

TV에선 악어가 누gnu 떼 새끼들을 소리 없이 습격하고

어미들은 뼈도 못 추린 새끼의 주검을 보고 있다

유유히 사라지는 악어, 슬픔은 온전히 누gnu 떼의 것

 

지옥도를 현실에서 목도하는 느낌이랄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눈을 감을까?

 

유죄인멸의 우려가 없는 무리 중

표정연기에 가장 능한 한 명을 골라 봐!

폭탄 돌리기에 급급한 무리들 앞에

우아하게 잡혀와 거짓 눈물을 보이는 그녀 말이야!

 

책임을 물으면서 책임의 해결을 맡기는 신파가 어디든 있지 않니?

관객은 주인공의 배경일까? 돋보잡일까?

 

게임의 본질을 잃어버린 세상에 대해

확률이 높은 죽음에 대해 물어 볼 거야!

 

흥정에 실패한 사기꾼의 의기소침 같은 것

뼛속까지 파고드는 숨긴 손톱 같은 것

창녀의 달콤한 혀 돌기 같은 것

 

앞장서 달리는 분노가 이성을 끌어가지 않니?

진행형의 슬픔은 어쩌면 좋을까?

 

비는 지리멸렬 창을 때리고

초원의 누gnu 떼는 다시 풀을 뜯고

화면을 돌리면 TV에선 신나는 세상 여행이 방영되고.

 

마이산 정형무

 

산 개미가 죽은 개미를 물고 가는 여기는

싸리꽃 붉은 암마이봉 꼭대기다

 

나는 아까 울었다 타래난초가 피어 있어서

 

연꽃 보러 풀숲을 헤치다

꽃뱀 한 마리를 놓아 보냈다

 

나비 날고 바람이 일렁인다

구름 없는 하늘이 더럽게 푸르다

 

나는 산 너머 산들을 굽어보며

한 생각이 연이어 피고 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죽어서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숨 쉬다 말고

살아서 아등바등 산을 내려갔다

 

 

                                         *: 월간우리201010월호(통권388)에서

                                              *사진 : 점점 색이 다양해진 10월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