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폭풍우속에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있는 것 같아
멈칫멈칫
먼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폭풍우가 지나간 후
무지개 피어나는 푸른 산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낮이면 새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먼 산,
밤이면 은하수 무수한 별들이
노를 저어 산으로 내려와
우주의 소소한 이야기들로
푸른 꽃 피우는 먼 산,
그, 먼 산에 머무는 어린왕자가 되는 꿈을 꾸어봅니다.
2020년 가을
다락방에서 박 흥 순
♧ 장다리꽃
불볕의 이맘때가 되면
죽교동 언덕배기
버섯 닮은 집, 그 문간방 생각이 난다
삼십대 엄마는
양은그릇장수, 집을 떠나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외로운 섬이 되어 떠돌고,
머리에 산더미 같은 양은그릇을 이고,
땀 흐르는 등짝에는 삼남매 눈빛이 흐르고,
당신의 아픔을 이고지고 돌 때……
옥수수죽 먹기 싫다고
울며 보채며
엄마 찾는 누이들 달래는
나는 까까머리
땡볕은 탱탱해 터질 듯 하기만 한데
개구락지참외
무화과 몇 개
시콤세콤 물외국 앞에 두고
엄마 바라보며
파란 웃음 방안 가득 쏟아내던
죽교동 언덕배기 그때 생각이 난다.
♧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
녹슨 자물통에 열쇠를 밀어 넣고 오른쪽으로 돌리니,
철커덕! 가을부채 같은 시간의 숨소리들이
팃검불처럼 흩어져 나온다
항아리 속 가득하던 고추장같은 세월 속에
장다리꽃으로 저물어 가던 우리 어무이,
달 물결에 흔들리던 살사리꽃 같던 누이들
열기 내뿜으며 먼 바다 바라보던
까까머리 아이의 그 눈빛
자물통에 열쇠를 넣고 한 번 더 돌리니,
개펄 위로 밀물이 어깨동무하고 밀려오듯
흘러간 바람의 수런거림이 들려온다,
낯꽃 피는 마을 찾아 달려가며 헐떡거리던 시간 속에서는
파장의 장돌뱅이 마른 기침소리가 흩어져 나오고,
개똥에 미끄러져도
노랗게 웃으며 홀씨는 날려야 한다고 소리치던 아이는
보이지 않는데
녹슨 자물통에 열쇠를 넣고 돌리는
흐릿한 눈빛 속에서는 푸른 바람이 솟구쳐 나오고 있다
♧ 산두, 그 고샅길
고샅길 하면 성문이네 집 굴뚝에서 저녁연기가 스몰스몰 오를 것만 같은, 그리고 고샅길 하면 금방이라도 성두네집 누렁이가 꼬리를 스르렁스르렁 흔들며 달려 나올 것만 같은
그때 고샅길은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다 태일네 돛단배에서 감자서리를 하던
귀뚜라미 신바람나게 기타를 켜는 달밤이면
그, 흐드러진 달빛 아래 청무우 사각사각 깎아먹던
킥킥거리던
송희네집 흙담 너머
그 아이 얼굴 닮은 단감을 따먹자고
도둑고양이처럼 흙담을 기어오르다
마당으로 떨어져,
달빛을 걷어차며 달아나던 발자국 소리로 출렁이던
고샅길은 눈 내리면 친구들이 몰려나와
자박자박 코스모스 꽃 수놓던 꿈길
아니, 낄낄대며 호호 불며
눈꽃으로 피어나던.
♧ 괴로움이 꿈틀거릴 때 - 박흥순
빈 깡통을 콘크리트 바닥에 두고 망치로 찌그러뜨린다, 나는 망치를 들고 다니는 건축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새로 짓는 집은 시간이 흐르면 집 모양이 바뀌어 간다 창문이 꽈배기처럼 휘기도 하지만 중간층이 장구모양의 집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이상한 집을 짓는 이상한 건축가라고 수근거린다 그렇다고 나는 주춤하지 않는다
보라는 듯이 이번에는 창문이 하늘을 보며 놀고 있는 파란 집을 지었다, 창문도 파랗게 웃었다 입이 머리통 뒤에 달린 사람들, 눈이 발톱 밑에 붙은 사람들, 그들이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 대신, 날아가다 똥을 싸고 가는 새들의 몸짓을 볼 수 있고, 웃고 가는 뭉게구름 사시로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큰소리쳤다, 사람들은 나를 갸우뚱 건축가라고 한다
내 아버지가 사용하던 나선형의 대나무 사다리를 쓰기도 했지만 썩은 물푸레나무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위험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것을 사용하고 싶어 한다 망치가 필요 없는 집을 짓고 싶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초승달이 뜨는 밤이면 말했다 망치 같은 연장을 쓰지 않고 초승달 같은 집을 지어서 거기 살고 싶다고,
나는 아버지 유산인 썩은 물푸레나무로 만든 휘어진 사다리를 타고 아버지에게 갔다 초승달 같은 집에 누워있던 아버지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빨리 내려가라고 했다 내가 묻기도 전에, 망치로 꿈이 없는 집짓는 것보다, 푸른 깡통이 열리는 한그루 나무를 초승달이 뜨는 언덕에 심으라 했다 나는 오늘도 빈 깡통을 콘크리트 바닥에 두고 망치로 찌그러뜨리고 있다.
♧ 별 볼 일 없는 생각
“너는 내 다락방으로 가야겠다”
들녘이나
동네 골목길이나
갈지자를 걷다가도
눈에 밟히는 그 무엇이 있으면 나는 그렇게 말한다
동전 가득한 공중전화기를 만났을 때,
전화기에 동전을 밀어 넣고 나누었을
그 사람들의 대화를 상상하면서
짜릿한 맛을 느끼며 즐겼던 카바레 작업장에서처럼
형형색색의 양초, 버림받은 괘종시계, 노란 손풍금
혼자서는 들 수 없었던 박혁거세 돌덩이
대나무 바구니, 상처투성이 교자상
쓰레기 통속 인형이 서재에 가면
어둠을 밀치고 나를 반긴다
내가 그들은 모셔다 두며 눈빛을 주는 것은
별 볼 일 없는 나의 모습이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그래서 언젠가, 그들을 시詩의 옷으로 바꾸어 주고 싶은
내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생각 때문이다.
* 박흥순 시집『장다리꽃』(문학아카데미 시선 305, 2020)에서
* 사진은 몇 년 전 찍은 여미지식물원과 그 주변 풍경.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일을 여는 작가'의 시(3) (0) | 2020.11.02 |
---|---|
'내일을 여는 작가' 의 시(2) (0) | 2020.10.22 |
월간 우리詩 10월호의 시(3) (0) | 2020.10.18 |
'내일을 여는 작가'의 시(1) (0) | 2020.10.14 |
'우리詩' 2020년 10월호의 시(2) (0) | 2020.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