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내일을 여는 작가'의 시(3)

김창집 2020. 11. 2. 18:18

 

자전하는 방 - 정우신

 

아이들은 킥보드를 타며 공원을 빙빙 돌고

 

달고나 커피를 만들며

지구가 도는 것을 느껴본다

 

패션 프루트 같은 바이러스

 

자신의 사라진 얼굴을 찾는데

이름 없는 생물과 호흡이 섞여

기침이 나오는데

 

나는 방금 당신을 지나친 것일까

 

찻잔이 떨어져도

깨지지 않는다

 

챌린지라는 평화롭고

안전한 세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 있는 중력

 

청을 담그고

치즈 케이크를 만들고

 

어느 날 나는 당신이 좋아지고

사랑에 갇힌 내가 괴롭고

 

낮달처럼

빈 눈동자만 남은 우리

 

아이는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길고양이에게 내민다

 

고양이는 동네 골목을 돌고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웃어본다

 

--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김수영 전집, 민음사, 2018

 

 

지구별은 치료 중 - 이종형

 

나는 이상한 1학년이에요

담임 선생님께 인사도 못 드렸고

반 친구들도 아직 만나보지 못했어요

어젯밤도 형아랑 같이

학교 가는 꿈을 꿨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내 멋진 교복은 여전히 옷걸이에 걸려있어요

 

엄마는 요즘 집에서 젤 무서운 사람이에요

하루 종일 우리 뒤치다꺼리 하느라

숨 막혀 죽을 것 같다는데

엄마가 죽을까봐 걱정이 돼서 그런지

형아도 아빠도 엄마 눈치 살살 보며

말을 잘 듣는 거 같아요

 

나를 작은 강아지라 부르는 할아버지께

언제면 학교에 갈 수 있을지 여쭸더니

지구별이 조금 고장 나서

지금 어른들이 열심히 고치고 있는 중이래요

나도 같이 고치고 싶다고 했더니

엄마 말씀 잘 듣는 게 아픈 지구별을 빨리 낫게 해주는 거래요

그렇게 몇 밤만 더 자면 드디어 학교에도 갈 수 있고

이상한 1학년이 아니라 진짜 1학년이 되는 거래요

 

고장난 지구별 빨리빨리 고쳐주세요

더 이상 아프지 말게 해주세요

꼭 좀 부탁드려요

 

 

해변의 눈사람 - 신철규

 

여기는 지도가 끝나는 곳 같다

 

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생각을 멈추어도 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닌 것이 인간이 되려고 한다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되려고 한다

 

눈사람은 녹았다 얼어붙었다 하는 사람

더 이상 녹지 않을 때까지 타오르는 사람

더 이상 얼어붙지 않을 때까지 흐르는 사람

 

두 사람의 발자국이 모였다가 갈라지는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을까

 

마음으로 와서 몸으로 나가는 것들

몸으로 와서 마음에 갇힌 것들

굳은 마음

손을 대면 손자국이 남을 것 같은

 

우리는 여권을 잃어버린 여행자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서로의 발끝만 내려다보면서

손바닥을 펴서 네 심장에 갖다 댈 때

눈 속의 지진

지진계처럼 떨리는 속눈썹

 

나는 그림자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몸을 웅크린다

 

눈사람의 혈관에는 얼어붙은 피가 고여 있다

모래알갱이가 덕지덕지 붙은 몸으로

거센 바람에 휘청거리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 유용주

 

사랑하는 사람아 맨얼굴을 보고 싶다

 

마음대로 가고 싶다

마음대로 공부하고 싶다

마음대로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고 싶다

 

꽃피는 봄도

신선한 공기도

풀과 나무가 자라나는 여름 산을 보고 싶다

굽이쳐 흐르는 강을 보고 싶다

파도치는 바다를 보고 싶다

단풍 곱게 물드는 골짜기를 보고 싶다

눈 내리는 벌판을 바라보고 싶다

 

낙타를 사막으로 돌려보내라

원숭이를 숲으로 돌려보내라

박쥐를 동굴 속으로 돌려보내라

 

벌레와 식물과 동물이 같이 살려면 영역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이 늘어나면 동물이 줄어든다

 

바이러스는 인간의 탐욕 때문에 생겼다

편리함 때문에 생겼다

우리 모두 조금씩 가난하게 살자

조금씩 내려놓자

조금씩 불편하게 살자

 

관을 많이 만들어야 이익이 남는가

무덤을 밤낮없이 파야 정신 차리려는가

결국 죽음 속으로 들어간 뒤에야 반성하려는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오자

우리가 잊어버린 것을 다시 끄집어내자

 

사랑하는 사람아 맨얼굴을 보고 싶다

 

 

가장 오래된 백신 송경동

 

코로나19로 국가 봉쇄령이 내려진

인도 수도 뉴델리 외곽

삼륜인력거꾼으로 일하던 아빠와 세 살던

열다섯 소녀 조티 쿠마리

 

정지된 세상을 따라 인력거도 멈추고

때마침 다리마저 다친 아빠

세를 내지 않으면 쫓아내겠다는 무서운 주인

수중에 남은 돈은 한화로 고작 33천원

 

아빠, 고향으로 가자고

남은 돈 털어 분홍색 자전거 한 대 사고 나니

수중에 남은 건 물 한 병

그렇게 아빠를 태우고 1,200km를 쉬지 않고 달린 소녀

 

어떤 재난과 위험 속에서도

우리를 끝내 살리는 건

오직 사랑뿐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다시 가르쳐 준 소녀

 

그 소녀와 사내에게 제 몫의 물 한 모금

밥 한 공기 덜어준 이웃들이 함께 이룬

경이로운 삶의 내연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영원한 고향은

 

오직 사랑뿐

 

 

                        *내일을 여는 작가 2020 하반기(77)

                         [기획특집] 질병, 이후의 문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