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십여 년 시를 써왔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내 새끼 같은 시들을
집으로 불러들이게 되어
마음 설렌다.
아롱이다롱이지만
즐겁게 봐주실 분들이 계실 거라고 믿으며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에
우울한 이즈음
잠시나마 마음에 쉼이 되길 빈다.
2020년 여름
나영애
♧ 각설탕이 녹는 시간
툭하면 왜
딱딱하고 뾰족한 말을 내뱉느냐고요?
새하얗게 각을 세우냐고요?
제가 그랬군요
풍진 세상이라 그렇게 된 것 같군요
저 혼자선 힘들 것 같아요
촉촉한 말
따듯한 손 내밀어 주실래요
각진 마음 둥글게 깎이도록
참고 기다리고 있으니
가둬진 말 풀려 나올 거라 믿어요
당신과 내 가슴, 달달하게 적실…
♧ 해국
바다여 나의 바다여
억겁의 세월 속에
그대 향하여 피어난
해국입니다
은하수 같은 사모의 언어
별꽃으로 펴
바다
그대에게 뿌렸습니다
이 몸
바위에 묶였으나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임 향한 나의 뿌리
결단코
그대 깊은 가슴에 뻗으리다
하늘로만 향하여 물들어 가는 이여
단 한 번만이라도
내게 고개 돌리소서
당신의 사랑보다 깊은
그대만 일평생 바라기하는
나, 해국을 봐 주소서
♧ 겨울 담쟁이를 위하여
바스러질 듯 마른 담쟁이
쌀쌀한 햇살 한 줌에 몸 녹이며
매끄러운 전봇대에 따개비처럼 붙어있네
한 때는 푸른 이파리 끌고 세상 벽을 누볐겠지
굵고 두툼한 힘줄 솟은 팔은 듬직하여
꽃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었지
꿈의 세계라 믿고 온몸으로 기어 오른 고지
벽을 넘어 보니 별세상도 아니었네
이제 수맥은 마르고
떨리는 팔다리 어눌한 말
가시 바람과 눈雪이 두려운 때가 왔네
어느새 집안의 기둥이 되어 버린 여자
“여보, 내 등에 붙이세요.
햇살과 손잡고 오솔길 걸으며 산새들과 노래도 하고
아침마다 그랬듯 출근 준비 거들어 줘요
오물도 버려 주고요
어제처럼 오늘도 또 내일도 손잡고 잠 들어요
쉼 얻을 피안의 그곳
사뿐히 넘어갈 그날까지.”
♧ 홀아비바람꽃 - 나영애
부용천 산책로
이순쯤의 깡마른 남자가 지나간다
풍 맞은 듯
운동화 질질 끌고 가는 길
오른쪽 팔 허공에 제멋대로 흔들며
천변을 걷는다
방과 마루
뽀얀 시간이 쌓이고
시어빠진 김치 쪽에 라면 끓여 자시고
발바닥 시린 시간 빠져나왔나 보다
낯선 시선 아랑곳없이
따스한 햇살 아래 오물거리는 입술
기도라도 드리시는지
알아듣지 못할 말 주절주절 맺힌다
폐허가 된 남자
세상의 무관심 속에 밀어 올리는
희망의 꽃대를 본다
지금 두메산골 어디쯤
홀아비바람꽃이 한창 피어나겠다
♧ 쥐똥나무 꽃
수더분한 지분 향이
코를 잡아당겨
가던 걸음 멈췄다
어깨에 어깨 걸고 놀이터 빙 둘러친
쥐똥나무 꽃
초록 이파리 사이
밥풀보다 작게 핀 하얀 꽃 향기
앞치마에 흰 머리쓰개 하고
흙바닥 정지에서
조물조물
밥상 차리는 젊은 아낙 같다
쥐똥나무
놀이터 감싸 아이들 보호하듯
섬기는 사람이 향기롭다 말한다
♧ 겨울 억새
갈색으로 야윈 억새
바스락거린다
미쳐 떠나보내지 못한 열매 달고
늘 초록이기를 꿈꾸던 희망
시간이 흩어져 갔다
짹짹 가족이 위로 공연해주고
앞으로만 가는 샛강물
윤슬로 안부 묻는다
이들과 어우러져
묵묵히 끝을 살아가노라면
어미 아비의 바람막이 속
초록이 태어나
대를 이어 나를 살아 줄 거다
반짝 겨울 햇살의 보시 받는다
* 나영애 시집 『각설탕이 녹는 시간』(도서출판 움, 202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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