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서
1992년 12월
첫 시집 ‘섬을 떠나야 섬이 보입니다’를 낼 때의 설렘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모든 것을 다 갖고 싶고, 다 하고 싶었던 젊은 시절엔 떠나야 바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70이 넘어 욕심을 하나하나 내려놓으며 생각해보니 내가 곧 섬이었고 바다였고 산이었음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떠나지 않아도 볼 수 있게 되었나 보다. 그래서 쓴 시가 ‘섬에 있어도 섬이 보입니다’이다.
그러다 보니 시가 쉬워졌다.
꾸미는 말과 기교가 사라지고 더러는 실체를 보게 됐다. 어린아이 눈으로 보는 것! 그것이 어른의 진실임을 알게 되었다.
시집을 내는 일은 부끄럽다. 늘 모자라니까.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쓰는 것이 덜 부끄럽다.
앞으로도 덜 부끄러운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2020년 가을
고성기
♧ 섬에 있어도 섬이 보입니다
섬에 있어도
눈 감으면
이리 환히 보이는 걸
내 젊은 날 왜 그렇게
떠나야만 보였을까
이맘쯤
사려니숲엔
복수초 노랗겠다
눈 밝혀 보려하니
섬은 떠나야 보이는가
푸른 파도 앞에서도
이게 섬인 걸 몰랐었다
이맘쯤
한림 앞 바다
자리 팔짝 뛰겠구나
교래 숲 가운데 서도
숲과 나무 다 보이는 걸
나무만 보고 있다고
어리석다 하잖아요
눈 감고
새 소리 들으면
영실 단풍이 활활 타네요
정류헌에 노루 왔으니
산록도로 눈 쌓였겠다
새 소리 외로우면
그토록 혼자 울면
와락 와
안기는 섬들
우린 모두 섬이었구나
♧ 손바닥선인장
파도에 떠밀려 온 몸
어디엔들 살지 못하랴
짠 것에 목마른 몸
바위틈이라 누굴 탓하랴
참은 것
그 죄 뿐인데
얼굴에 돋은 형벌
월령리 갯바위에
죽은 듯이 살다보니
귀하면 천연기념물
분에 넘친 신분 상승
파도야
너는 알거야
왜 참고 부서지는지
♧ 백팔 배
절엔 뭐 하러 가니?
그야 절하러 가지
복 빌려고 절하는 거지?
아냐, 낮추려는 거지
백팔 배
적멸보궁엔
풍경도 깨어 있다
얼마큼 낮추어야
참회가 되는 걸까
백여덟 번 합장하고
다시 절하고 또 비우니
상원사
문수동자는
어제처럼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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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산 월정사의 말사 상원사에서 1킬로미터쯤 걷다가 가파른 돌계단 400미터를 올라가 면 사자암이 있고, 다시 가파른 600미터 돌계단을 오르면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조그만 암자 적멸보궁이 있다.
♧ 산수국
뒷모습이 고운 계절
길가 숲속
연보라빛
낯붉힌
신비로움
장맛비에 씻길까봐
발 동동
가슴까지 저려
퍼렇게 멍든
환희
*고성기 시집 『섬에 있어도 섬이 보입니다』(파우스트, 202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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