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고성기 시집 '섬에 있어도 섬이 보입니다' 발간

김창집 2020. 11. 10. 09:40

*추자 돈대산에서 본 제주도

자서

 

199212

첫 시집 섬을 떠나야 섬이 보입니다를 낼 때의 설렘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모든 것을 다 갖고 싶고, 다 하고 싶었던 젊은 시절엔 떠나야 바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70이 넘어 욕심을 하나하나 내려놓으며 생각해보니 내가 곧 섬이었고 바다였고 산이었음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떠나지 않아도 볼 수 있게 되었나 보다. 그래서 쓴 시가 섬에 있어도 섬이 보입니다이다.

 

그러다 보니 시가 쉬워졌다.

꾸미는 말과 기교가 사라지고 더러는 실체를 보게 됐다. 어린아이 눈으로 보는 것! 그것이 어른의 진실임을 알게 되었다.

시집을 내는 일은 부끄럽다. 늘 모자라니까.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쓰는 것이 덜 부끄럽다.

앞으로도 덜 부끄러운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2020년 가을

                                                                                                            고성기

 

섬에 있어도 섬이 보입니다

 

섬에 있어도

눈 감으면

이리 환히 보이는 걸

내 젊은 날 왜 그렇게

떠나야만 보였을까

이맘쯤

사려니숲엔

복수초 노랗겠다

 

눈 밝혀 보려하니

섬은 떠나야 보이는가

푸른 파도 앞에서도

이게 섬인 걸 몰랐었다

이맘쯤

한림 앞 바다

자리 팔짝 뛰겠구나

 

교래 숲 가운데 서도

숲과 나무 다 보이는 걸

나무만 보고 있다고

어리석다 하잖아요

눈 감고

새 소리 들으면

영실 단풍이 활활 타네요

 

정류헌에 노루 왔으니

산록도로 눈 쌓였겠다

새 소리 외로우면

그토록 혼자 울면

와락 와

안기는 섬들

우린 모두 섬이었구나

 

손바닥선인장

 

파도에 떠밀려 온 몸

어디엔들 살지 못하랴

짠 것에 목마른 몸

바위틈이라 누굴 탓하랴

참은 것

그 죄 뿐인데

얼굴에 돋은 형벌

 

월령리 갯바위에

죽은 듯이 살다보니

귀하면 천연기념물

분에 넘친 신분 상승

 

파도야

너는 알거야

왜 참고 부서지는지

 

백팔 배

 

절엔 뭐 하러 가니?

그야 절하러 가지

복 빌려고 절하는 거지?

아냐, 낮추려는 거지

백팔 배

적멸보궁엔

풍경도 깨어 있다

 

얼마큼 낮추어야

참회가 되는 걸까

백여덟 번 합장하고

다시 절하고 또 비우니

상원사

문수동자는

어제처럼 웃고 있다.

 

--

* 오대산 월정사의 말사 상원사에서 1킬로미터쯤 걷다가 가파른 돌계단 400미터를 올라가 면 사자암이 있고, 다시 가파른 600미터 돌계단을 오르면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조그만 암자 적멸보궁이 있다.

 

산수국

 

뒷모습이 고운 계절

길가 숲속

연보라빛

 

낯붉힌

신비로움

장맛비에 씻길까봐

 

발 동동

가슴까지 저려

퍼렇게 멍든

 

환희

 

 

                               *고성기 시집 섬에 있어도 섬이 보입니다(파우스트, 202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