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집, 그 골목길 - 김요아킴
더 이상 오르지 못한
절집 아랫동네의 골목은
미로다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담벼락에
기생하여 꽂혀 있는
의문의 부호들
그 옛날, 아비의 아비가 밤늦게
마시고 버린 소주병과
그 아비의 어린 시절 조르고 졸라
얻은 먹은 환타 병이
세월의 마침표로 찍혀있다
햇빛 찰랑거리는 오후, 더욱
반짝여야 할 식구들의 서사가
녹슨 철제대문 안으로
생의 철거를 맞이할 무렵
이 빠진 장독을 툭 건드린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익숙한 침묵을 깬다
마악 산에서 내려온
이미 술맛을 아는 한 사내가
그 탄산의 기억을 붙잡고
먼 고향을 발굴 중이다
♧ 발 - 박일만
불편하신 것 같아 들여다 본
어머니의 두 발
각질 두텁고 곳곳이 갈라졌다
허리통증 때문에도 그렇고
눈이 침침하여 집중력도 떨어져서
깎아내시지 못한 발톱이 무성하다
핏기 가시고 거죽만 남은 발
잡초처럼 갈라지고 들뜨고 부서진 발톱
저 발로 팔십 성상을 건너오셨다
저 발톱으로 남루한 생애를 가꿔 오셨다
여리디 여린 발로 여기까지 오셨으니
갈라지고 들뜨고 부서지고,
발톱을 가지런하게 깎아드리다가
영문 모를 내 눈물이 어머니 발등을 툭,
연고처럼 덮었다
♧ 하루 – 임승진
하루살이의 일생은
겨우 하루 남짓
그 하루 동안에
먹고
성장하고
사랑해서
자손까지 여럿 두는데
그에 비하면
사람의 하루는 얼마나 긴가?
아침 눈을 떠서
저녁 잠들 때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
90년…
그 이상의 세월을 살면
일장춘몽이라 말한다
하룻밤
♧ 솔로의 하루 - 김인숙
창문을 열고 건너편
빌딩 옥상의 광고판을 읽는다
조종당하는 모르모트처럼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움직인다
백내장 거리는 온통 황사지만
창틈으로 시든 꽃송이들을 버리는 그녀,
각각의 속도로 피고
같은 속도로 떨어지고 있는
꽃송이들을 보고 있다
형광등 불을 켠다
먹다 남은 굳은 빵이 보이고
짙은 선글라스를 쓰다가 벗다가
자신의 시력이 어느 쪽인지 궁금해진다
거리의 빈 곳까지 바람 좀 불러 줘요
먼지 낀 장신구를 달아 줘요
달리는 초침을 잡아 줘요
내 뒤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
나는 누구의 앞에 서 있는지
제발 알려 주세요
그러니 꽃의 말로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 소파 노파 파파 - 강우현
빌딩 앞에 소파가 버려져 있다
사무실 가장 근사한 자리에 앉았던 가죽옷은
시간이 할퀸 자리마다 해졌다
서류를 짓누르는 한숨이 잠깐 쉬던 자리에
너털웃음이 마지막 엉덩이를 붙이고 떠났다
정년이 지난 직원의 자리는 문 밖
업무가 없다는 단호한 스티커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행인들을 저지한다
오직 예스맨이던 얼굴에서 입을 지우고 귀를 닫고
진리를 깨우친 듯한 품이 기다림을 놓아준다
밥이 되고 집이 되고 내일이 되던
결재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누군가 앉았다 일어서면 내일이 환해지고
누군가는 손에 땀을 쥐기도 하던 저 노파
지팡이를 짚고 가던 할머니가 엉거주춤 앉자
기운이 달리는 품으로 습관인 듯 사랑인 듯 오래 받아 안는다
횡단보도 너머로 구청 트럭이 보일 때
엄마 얼굴 모르는 조카를 장가보내고 가야 한다시던
팔순 넘은 아버지가 뛰어왔다
♧ 우이동 우거 - 洪海里
예가 제 집인 줄 알고 귀뚜라민 밤낮이 없고
그제는 고추잠자리가 날아오더니
어제는 베짱이가 오고
오늘은 버마제비가 한잔하자고 찾아왔다.
*월간 『우리詩』 2020년 11월 389호에서
*사진 : 11월 8일 한라산둘레길 수악교 코스의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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