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때기 청봉
나는 아직 설악 상상봉에 가 보지 못했네
이 산 밑에 나서 마흔을 넘기고도
한 해에도 수만 명씩 올라가는 그곳을
나는 여태 가보지 못했네
그곳에서는 세상이 훨씬 잘 보인다지만
일생을 걸어도 오르지 못할 산 하나는 있어야겠기에
마음속 깊은 곳에 대청봉 묻어 놓고
나는 날마다 귀때기 청봉쯤만 바라보네
♧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 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 밖에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 다른 벌레였을까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 산그늘
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나에게 젖을 물리고 산그늘을 바라본다
가도 가도 그곳인데 나는 냇물처럼 멀리 왔다
해 지고 어두우면 큰 소리로 부르던 나의 노래들
나는 늘 다른 세상으로 가고자 했으나
닿을 수 없는 내 안의 어느 곳에서 기러기처럼 살았다
살다가 외로우면 산그늘을 바라보았다
♧ 소나무 숲에는
소나무 숲에는 뭔가 있다
숨어서 밤 되기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은근할 수가 있는가
짐승처럼 가슴을 쓸어내리며
모두 돌아오라고, 돌아와 같이 살자고 외치는
소나무 숲엔 누군가 있다
어디서나 보이라고, 먼 데서도 들으라고
소나무 숲은 횃불처럼 타오르고
함성처럼 흔들린다
이 땅에서 나 죄 없이 죽은 사람들과
다치고 서러운 혼들 모두 들어오라고
몸을 열어놓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람 부는 날
저렇게 안 우는 것처럼 울겠는가
사람들은 살다 모두 소나무 숲으로 갔으므로
새로 오는 아이들과 먼 조상들까지
거기서 다 만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 밥 짓는 연기들은
거기 모였다가 서운하게 흩어지고
소나무 숲에는 누군가 있다
저물어 불 켜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기다리는 누군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날마다
저렇게 먼 데만 바라보겠는가
♧ 한계령 자작나무들이 하는 말
일본이 패망해서 도망가고 난 뒤
양양은 북한 땅이었다가
육이오전쟁으로 남한 땅이 되었다
그래서 수복지구라고 불렀다
동해 기사문리其士門里에서 먼 서해까지
삼팔선은 은하수처럼 지나갔는데
그 선에 걸려 넘어진 사람은 골병이 들었거나
죽었다
양양에 가을이 오면
먼 바다 연어들은 있는 힘을 다해 돌아오고
이슬만 받아먹던 송이들도 산을 내려오는 건
여기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그런다는 걸
어느 날 한계령을 넘다가
자작나무들이
저희끼리 이야기하는 걸 나는 들었다
♧ 별 만드는 나무들
설악산 수렴동에 들어가면
별 만드는 나무들이 있다
단풍나무에서는 단풍별이
떡갈나무에선 떡갈나무 이파리만한 별이 올라가
어떤 별은 삶처럼 빛나고
또 어떤 별은 죽음처럼 반짝이다가
생을 마치고 떨어지면
나무들이 그 별을 다시 받아내는데
별만큼 나무가 많은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산에서 자본 사람은 알겠지만
밤에도 숲이 물결처럼 술렁이는 건
나무들이 별 수리하느라 그러는 것이다
♧ 용량容量
영하의 날씨가 계속된다
엄동이다
길가의 나무들이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서 손을 흔들다가
차가 지나갈 때마다 저만큼씩 따라간다
냇물도 애들처럼 시퍼렇게 얼었다
히터가 제 몸에 달린 온도계 눈금을 끌어올리려고
애는 쓰는 데 안 되니까
버스매표소 구석에서 그냥 울고 있다
*『산림문학』통권 제40호(2020년 겨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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