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산림문학' 초대시 - 이상국

김창집 2020. 12. 19. 01:54

귀때기 청봉

 

나는 아직 설악 상상봉에 가 보지 못했네

 

이 산 밑에 나서 마흔을 넘기고도

한 해에도 수만 명씩 올라가는 그곳을

나는 여태 가보지 못했네

그곳에서는 세상이 훨씬 잘 보인다지만

일생을 걸어도 오르지 못할 산 하나는 있어야겠기에

마음속 깊은 곳에 대청봉 묻어 놓고

 

나는 날마다 귀때기 청봉쯤만 바라보네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 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 밖에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 다른 벌레였을까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산그늘

 

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나에게 젖을 물리고 산그늘을 바라본다

 

가도 가도 그곳인데 나는 냇물처럼 멀리 왔다

 

해 지고 어두우면 큰 소리로 부르던 나의 노래들

 

나는 늘 다른 세상으로 가고자 했으나

 

닿을 수 없는 내 안의 어느 곳에서 기러기처럼 살았다

 

살다가 외로우면 산그늘을 바라보았다

 

소나무 숲에는

 

소나무 숲에는 뭔가 있다

숨어서 밤 되기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은근할 수가 있는가

짐승처럼 가슴을 쓸어내리며

모두 돌아오라고, 돌아와 같이 살자고 외치는

소나무 숲엔 누군가 있다

어디서나 보이라고, 먼 데서도 들으라고

소나무 숲은 횃불처럼 타오르고

함성처럼 흔들린다

이 땅에서 나 죄 없이 죽은 사람들과

다치고 서러운 혼들 모두 들어오라고

몸을 열어놓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람 부는 날

저렇게 안 우는 것처럼 울겠는가

사람들은 살다 모두 소나무 숲으로 갔으므로

새로 오는 아이들과 먼 조상들까지

거기서 다 만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 밥 짓는 연기들은

거기 모였다가 서운하게 흩어지고

소나무 숲에는 누군가 있다

저물어 불 켜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기다리는 누군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날마다

저렇게 먼 데만 바라보겠는가

 

한계령 자작나무들이 하는 말

 

일본이 패망해서 도망가고 난 뒤

양양은 북한 땅이었다가

육이오전쟁으로 남한 땅이 되었다

그래서 수복지구라고 불렀다

 

동해 기사문리其士門里에서 먼 서해까지

삼팔선은 은하수처럼 지나갔는데

그 선에 걸려 넘어진 사람은 골병이 들었거나

 

죽었다

 

양양에 가을이 오면

먼 바다 연어들은 있는 힘을 다해 돌아오고

이슬만 받아먹던 송이들도 산을 내려오는 건

여기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그런다는 걸

 

어느 날 한계령을 넘다가

자작나무들이

저희끼리 이야기하는 걸 나는 들었다

 

별 만드는 나무들

 

설악산 수렴동에 들어가면

별 만드는 나무들이 있다

단풍나무에서는 단풍별이

떡갈나무에선 떡갈나무 이파리만한 별이 올라가

어떤 별은 삶처럼 빛나고

또 어떤 별은 죽음처럼 반짝이다가

생을 마치고 떨어지면

나무들이 그 별을 다시 받아내는데

별만큼 나무가 많은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산에서 자본 사람은 알겠지만

밤에도 숲이 물결처럼 술렁이는 건

나무들이 별 수리하느라 그러는 것이다

 

용량容量

 

영하의 날씨가 계속된다

 

엄동이다

 

길가의 나무들이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서 손을 흔들다가

 

차가 지나갈 때마다 저만큼씩 따라간다

 

냇물도 애들처럼 시퍼렇게 얼었다

 

히터가 제 몸에 달린 온도계 눈금을 끌어올리려고

 

애는 쓰는 데 안 되니까

 

버스매표소 구석에서 그냥 울고 있다

 

 

                                               *산림문학통권 제40(2020년 겨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