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김광렬 시집 '존재의 집'의 시(2)

김창집 2020. 12. 22. 11:05

버스는 간다

 

버스는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로 간다

기다리지 않아도 간다

단 몇 초의 만남일지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주저앉는 순간 그것은 버스가 아니므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어딘가로 가는 나도

포기하는 순간 나를 잃어버릴 것이므로

간다, 스스로 차를 굴리지 못하는 빈손들에게로

어느 불빛 아롱아롱 외로운 버스 정류소

한겨울 으스스 떨며

시린 발 동동 구르는 사람들에게로

아무리 무릎관절 삐걱거리고 몸 쑤셔도

그들의 든든한 다리가 되어주기 위해

그들이 외톨이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

나룻배처럼 수도승처럼 묵묵히 버스는 간다

버스에게는 아픔이 기쁨이다

아 내가 한동안 연락두절이었을 때

주소 달랑 들고 얼음장 같은 방 허위허위 찾아온

그 옛날의 아버지처럼,

노여운 얼굴에 감춰진 물속 깊은 사랑처럼

 

마음의 끈

 

이곳에서 살아가라고 탯줄을 끊었을 때

나는 마음의 끈을 가졌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끈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이어지고

또 다른 피붙이들에게도 이어졌다

 

그 후에는 적어도 내가 좋아하거나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로 뻗어갔다

 

내가 나쁜 생각을 가지기라도 한다면

그 끈은 어느 날

아주 뚝 끊어져 버릴 것이 분명하다

 

사랑 없이 살아가는 일은 어려우므로

 

나는 그 끈을 죽어라 붙들고

노심초사하며 그 가파른 길 걸어왔다

갈 길 없는 당신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어느 아름다운 사람에게

 

내가 지방지에 조그맣게 칼럼을 쓸 때

언젠가 잃어버린 번역시집 이야기를 꺼냈더니

참 오래도록 세월의 손때 배었을 뿐 아니라

책 주인의 깊은 마음씨까지 스민

二十世紀英詩選을 이름도 주소도 없이

누군가 우리 집 우편함에 넣어두고 갔다

두꺼운 하얀 백지로 한 겹 정성스레 둘러쌌다

곧 소름 같은 전율이 돋아났고

나는 그것을 책상 앞에 놓고 고민했다

그래, 돌려주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틈틈이 읽으면서

나도 나의 조그만 시집 한 권쯤 증정하고 싶었다

그때 그 심정을

마음이 퍼런 하늘보다도 더 높고 고운 그에게

두 손바닥 눈썹 위에 연잎처럼 펼쳐 얹어

공손히 바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

 

  사랑은 살과 살 뼈와 뼈 실핏줄과 실핏줄 피와 피 마음과 마음이 촛농처럼 한 덩어리로 녹아 허공 속으로 스미고 스며서, 보이지 않는 가느다랗고 단단한 통로를 따라, 참 힘겹게도 너에게로 가 닿는 속 깊고 등 푸른 물줄기이다

 

  누구에게나 사랑은 주어지고 누구나 안에 사랑을 품고 있으나 누구나 사랑을 하지는 않는다

 

  또 사랑을 한다 해도 그 사랑이 누구에게나 가 닿는 것은 아니다 튕겨져 나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그런 사랑도 있다

 

  끝까지 가 닿아 너의 안에서 붉은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잿더미가 되어도 좋다 잿더미 위에서 다시 사랑은 붉은 꽃 둥그런 핏방울을 맺으리라

 

물속 사람

 

처음 가보는 곳인데 낯익게 느껴지는 풍경처럼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어디서 보았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 그 자리에 선 채로

 

어릴 때 고향 집 언저리에도 가보고

거쳐 왔던 큰길 작은 길도 되짚어 보고

뿌연 어둠 저 너머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만났던 얼굴들도 찰칵찰칵 떠올려보지만

어느 것 하나 선명치 않은데

 

나의 안이나 밖 그 어디선가 자꾸만 본 듯한 사람

 

귓등 벌겋게 부끄럼을 잘 타던,

장승처럼 말이 없던,

어딘가 아픈 듯한,

그래서인지 늘 추워 보이던,

바라보는 눈길을 티 없이 바라보던,

 

어디서 보았더라, 비 후줄근히 오다 그친 밤거리

우연히 들여다본 물 고인 웅덩이 속

초라했으나 순박했던 저 사람을

나는 참 오래 잃어버리고 다른 길을 가고 있었네

 

 

                             *김광렬 시집 존재의 집시작시인선 0358(천년의 시작, 2020)에서

                                                           *사진 : 오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