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제주작가 2020 가을호의 시들

김창집 2020. 12. 7. 16:44

말의 주변 풍경 김병택

 

  태초에 있었던 말씀을 자신의 방식으로 풀이하는 그는 오래 전부터 말이 많다. 말 없는 사람은 없는 말로 살고, 말 많은 사람은 많은 말로 산다. 말 없는 사람에게는 기억해야 할 말이 없지만, 말 많은 사람에게는 기억해야 할 말이 많다. 말 많은 사람인 그는, 지금도 이미 쏟아낸 말들을 주워 담지 못해 힘든 나날을 보낸다.

  말 많은 사람의 입에서 출발한 말들은 넓디넓은 허공을 부유하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는 자신의 말에 자신이 해를 입고 있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언젠가 그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말들을 향해 화를 내며 소리칠 때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지금도 많은 말들로 집을 짓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차라리 운명이다.

 

한라산 어욱 - 배진성

 

한라산 어욱은 새가 되지 못하여

봄부터 베를 짜기 시작한다

초가지붕에도 오르지 못하여

베옷 한 벌 장만하기 시작한다

 

천둥 번개 요란한 여름에도

베틀소리 멈추지 않는다

새 옷 한 벌 얻어 입지 못하고

만가(輓歌)도 없이 숨 죽여 가신 님들

 

해 좋은 날, 어욱꽃 마을까지 내려온다

수의 한 벌 챙겨들고

요령소리 앞세우고

잃어버린 마을까지 잊지 않고 찾아온다

 

무너진 돌담 하나 대답이 없어

빈 상여 소리에

빈 수의 한 벌 흩어져 날아가고

갈 곳 잃은 바람의 곡비

온몸이 휘청거린다

 

뼈만 남은 한라산 억새

흰 눈 내려 헛묘에 묻히고

한라산 자락에는 해마다

메김소리 가득한 오름 하나씩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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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욱 : 억새의 제주도 말

* : 제주에서는 볏짚 대신 새로 초가지붕을 만들었다.

 

시인 양순진

 

나에게 가장 많은 건

돈도 책도 꽃도 아니다

 

노을 지거나

깊은 밤 혼자 별 바라볼 때

하염없이 비 쏟아질 때

준비된 배우처럼 여지없이

볼타고 흐르는

눈의 옥수

 

급작스레 사람이 죽고

고양이 배고파 울 때

개가 사육당할 때

다 끌어안을 수 없는 절망

짊어진 업보처럼

폭포수 되어 태평양까지 흐르는

심장의 전율

 

눈물은 나를 지탱하는 철학

나를 씻어주는 강

나는 눈물을 재산 삼아 시를 쓴다

굴곡진 인생의 파도를 탄다

 

나에게 가장 값진 건

울고 싶을 때

맘껏 울 수 있는 자유라는 음악

 

그러니 제발

달팽이처럼 살아가는

나를 건들지 말라

 

광치기해변의 아이들 오광석

 

이른 저녁

노는 아이들이 모래를 파다가

오래된 뼛조각을 주워

신기하게 돌려보고 있다

 

호기심이 밀물처럼 몰려온다

칠십여 년 전에 묻힌

우리 할아버지의 遺骸(유해)일까

 

바닷바람에 해변을 거니는

할아버지의 체향을 느낀다

그의 ()로 이루어진 검붉은 해변

그의 骨粉(골분)으로 만들어진 모래

세월에 녹아 한줌씩

바다로 퍼져나간다

 

시린 바닷바람에

모래가 날리자 쉬이

할아버지의 숨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은 추운 줄도 모르고

骨粉(골분)을 파헤치며

성을 쌓는다

 

노란 소국 이윤승

 

  마당 앞 꽃밭에 편안한 모습으로 계절을 잊은 노란 소국 한 무더기 피어 있다. 지난겨울 쓰레기통 옆에 버려진 화분 속 마른 소국을 꽃밭에 심었다. 옛날로 가는 새로운 길 하나 틔였다. 그 섬에 닿고 싶었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엄마 앞에서는 늘 국화꽃 향기가 났다. 엄마 같은 마음으로만 살고 싶었다. 가장이었던 엄마의 젖무덤을 만지면 겨드랑이에서 나는 쿰쿰한 냄새 나는 그것이 국화꽃 내음인 줄 알았다. 싱긋이 웃는 입가가 예쁘고 맑고 또랑또랑한 눈빛이 단아하게 느껴지는 작은 꽃, 나는 아버지의 추억이 있는 일곱 살의 어린 날로 아직 사랑을 모르던 열세 살적 단발머리 소녀로, 엄마와 까마득한 옛이야기를 하며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날들에 대해 생각한다.

 

  하늘이 총총 노란 국화꽃을 피웠으면 좋겠다. 그녀가 따뜻하게 피어날 수 있도록 남쪽 섬에 오래도록 서 있고 싶었다. 아스라한 거리, 빛으로 닿고 싶었다. 간혹 우리는 적요한 노란 별빛처럼 깊어지곤 할 것이다.

 

처서(處暑) - 이종형

 

푸른 몸들은 모두 자웅동체

 

그 많은 비를 언제 쏟아부었나싶게

말짱하게,

거짓말 같은 하늘이 열려 있고

그 우기의 무게를 다 받아내느라 기우뚱

몸이 한쪽으로 쏠린 바다는

수평선을 향해 덧칠하며 부지런히

중심을 바로잡고 있다

 

색이 덜 입혀진 풋것들을 위해선

바다는 푸르러야 하고

하늘은 그보다 좀 더 짙은 색이여야 한다

 

부디

한여름을 견뎌낸 씨앗들이 영글어

일용할 양식이 될 수 있기를

 

나는 지난여름에 썼으나 젖어서 그대에게 부치지 못한

문장을 한 줄씩 펴서 말리고 있다

 

 

                                        *계간 제주작가2020 가을(통권 제7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