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적암 오르는 길 - 김귀녀
설 명절 끝나고
남편과 함께 은적암 오른다
갈잎을 밟으며 우뚝 서 있는
갈참나무 숲길을 간다
봄을 기다리는
새순의 이불이 되리라
침묵의 언어로 들려주는
나무들의 바람소리 들린다
쏴 쏴 바람소리 무성한
침묵의 언어
겨울나무가 들려주는 바람소리 들으며
살던 때가 있었지
그 시절 우리 집 가훈은
제자리였다
아이들은 부끄럽다고 부끄럽다고
이제 우리 집 가훈은 겨울나무다
남은 세월
나그네 길
무거운 침묵으로 걸어가리라
맑은 가난도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 동짓날 밤이 오면 - 김내식
호롱불 심지 끝에 하늘하늘 타는 불꽃
문종일 바늘구멍으로 들어 온
황소바람에 흔들리고
아랫목은 아이들 차지
청솔가지 매운 연기에 눈물 짖는 어머니
퍼석한 아이들 주둥이 떠올리며
새알 내알, 보글보글
팥죽 끓인다
윗목에 새끼줄 꼬시던 아버지
귀신이 싫다는 붉은 죽을
헛간, 굴뚝, 통시로 두루 다니며 뿌려
액운을 몰아낸다
날마다 먹는 죽, 또 먹기 싫어
밥 달라고 투정하면
새알을 안 먹으면 나이가 ‘제자리’라니
호호 불어 식혀 먹었다
하늘나라에 눈발이 흩날리고
문풍지 부르르 떠는 동짓날 밤이 오면
산에 계신 우리 부모님
더욱 그립다
♧ 겨울 숲의 기도 – 김청광
한겨울 설산雪山
청청한 소나무
발가벗은 상수리나무
겨울 숲의 침묵
겨울 숲의 기도
나도 한 그루 작은 나무로 서서
한 해를 돌아보며 침묵하네
“무無는 천지의 시작
유는 만물의 어머니”*
겨울 숲은 무無인가 유有인가
길게 누운 나무 등걸 위
쓰러진 목숨조차 아름다워
그 위에 흰 눈이 내리네
비록 다 벗지 못한 목숨이라도
내 숨결 위에도
흰 눈이 내렸으면
---
* ‘無 天地之始 有 萬物之母’ 노자 도덕경 제1장
♧ 지치 - 김혜천
눈발이 밤 새워 길을 지웠다
설국의 아침은 깊기도 하여
너와 나의 경계를 무연히 지우고
나목들도 고개 숙여 걸어온 길을 바라본다
산수유 열매의 남은 즙을 빠는
노랑머리쪽쪽새가 정적을 깨는 정오
이웃 농장이 방목을 하였는지
한 무리의 사슴이
흩날리는 눈꽃을 받아먹으며
산 위로 산 위로 달려
바람에 흩어진 운무 속으로 사라진다
오지를 덮었던 눈꽃들이 잠을 깨면
허물도 자취 없을 하얀 나라
너는 어찌하여
눈부신 고요 위에 초경을 치루었느냐
어찌하여
제 몸을 흘려 주홍글씨를 새겼느냐
너를 안아다 누룩에 앉히면
그 붉은 속내 풀어낼 수 있겠니
---
*뿌리에 열기 성분이 있어 눈이 쌓이면 그 주위가 붉게 물든다. 진도홍주의 소재이기도 하다.
♧ 겨울나무 – 배택훈
맨몸 앙상하게 드러내고
부끄러운 것 없어
당당한 겨울나무는
열심히 살아온 사람의 모습이다.
가지마다 견디어 온 인고의 세월
굳건히 버티어 살아가는 야성野性
가늘은 가지 끝에는 새싹을 품고
찬 겨울 분보라쯤이야
솜사탕처럼 달콤하다.
내 인생도 저처럼 발가벗고
초연하게 서 있을 수 있을까.
투명한 겨울나무의 가르침에
겨울의 숲속이 따뜻하다.
♧ 숲에게 - 윤준경
내 마음에서 풀냄새가 나는 건
내 안에 네가 있기 때문이야
너와 함께였던 시간을 찾아
마음은 늘 숲에 있지
세상 죄다 가려주는 숲
큰키나무는 작은 덤불을
높은 풀잎은 낮은 꽃송이를
그리고 그 아래
더 조그만 나를 품어
풀물 들여 주는 숲
내 몸에서 풀냄새가 나는 건
다시 5월이 오는 때문이야
길을 떠나는 건 언제나
숲을 향하는 일
나에게서 너를 떠올리는 일
♧ 유마행維摩行 - 이명
치자꽃 한 송이 시들어
떨어지지 않고 가지에서 메말라가고 있다
단정하게 꽃잎을 오므리고 있는 것은
생각이 깊기 때문일까
그 속에
까만 씨앗 하나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 산에선 길을 잃어도 - 이서연
없는 길을 간다
삶이려니
없는 길을 가는 만큼이
삶이려니
가끔 물어도 길을 간다
그 길이 아니어도
물어도 잊으며 물은 걸 잃으며
배우는 것에서 길을 본다
연습 없는 길이라 가던 길도 잃는다
길을 찾으며 삶을 사용한다
길을 찾으면서 길을 잃는 일이 반복된다
길에서 길을 묻고 다시 삶을 소비한다
길에서 산을 만난다
산은 길이 아니다
모순의 이치에 나타나는 섭리처럼
길이 아닌 곳에 산이 길이다
그 길이 길을 준다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찾는 길을
길을 찾다가 산이 되는 길을
산에서 만난다
산에선 길을 잃어도 산이다
길을 잃고 산을 얻으면 삶이 산이 된다
산이 삶이 아니어도
삶이 되는 길이 산에 있다
길이 없는 산에서 길을 만나
산이 되는 삶이 되려니
산에선 길을 잃는다
길이 되는 산이 되려고
*『산림문학』2020년 겨울(통권 40호)에서
*사진 : 눈내리는 오름 숲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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