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김광렬 시집 '존재의 집'의 시(4)와 설경

김창집 2021. 1. 9. 12:30

침묵

 

침묵은 노래를 기다리는 현이다

 

기다린다는 말은

맹목적 수동 행위로만 규정해서는 안 된다

 

안에 붙은 불길을 다스리며

지긋이 기다리는 기다림도 있다

 

무르익은 무화가 열매 붉은 속살이

입안에서 터지는 순간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침묵은 그렇게 참 오래 기다려서

불꽃처럼 황홀한 노래가 되기도 한다

 

파경

   -, , , 또는 독설毒舌

 

가로로 쩍, 금 간 거울의 입에서

 

깨어진 유리조각들이

 

흰 거품처럼 마구 튀어나왔다

 

허공에 어지럽게 난사되었다

 

누군가는 크게 상처 입었을 것이다

 

저 뒷감당을 누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와불臥佛의 눈*

 

   실크로드 병령사 석굴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손바닥으로 한쪽 얼굴을 떠받치고 옆으로 길게 누어 묵상에 잠겨있던 와불臥佛, 속속들이 너를 들여다보겠다며 시시티브이를 켜듯 감고 있던 왼쪽 눈을 번쩍 떴다 순간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어린 시절 친구 따라 절집에 놀러 갔다가 막 대웅전 문을 여는 찰나 두 눈 딱 부릅뜨고 노려보는 금동불상을 보고 기겁하여 가시덤불에 무수히 찔리며 혼자 집까지 뛰었던 기억이 났다 어디를 가든 그 눈이 껌딱지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나는 오랫동안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유리병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지은 죄 많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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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불臥佛의 눈 : 원래는 두 눈을 모두 뜨고 있는 형상이지만 한쪽 눈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서 눈을 감은 것처럼 보이는 상태였으며, 내가 막 두 눈을 쳤을 때는 한쪽 눈을 번쩍 뜨는 것 같았다.

 

손님

 

꽃샘추위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몸살감기처럼

 

부실한 잇몸을 질책하며 우지끈 아파오는 치통처럼

 

사과 잇자국에 번지는 붉은 핏방울처럼

 

이른 새벽이면 슬그머니 면도날 들이밀며

 

, 신경을 베고 가는 두통처럼

 

땅바닥에 뭉텅 한목숨 바치는 동백꽃처럼

 

아픈 사람이 있다

 

그가 문밖에서 떨며 울고 있다

 

무릎뼈에게

 

아주 그리 심한 것은 아니지만

하루에 한 예닐곱 번 꼴로

왼쪽 무릎에서 뚜두둑 뚝

뼈 어긋나는 소리 힘들다는 소리

 

너를 위해 언제 한번

솜털구름 위를 걸어본 적 있나

손바닥 땅에 짚고

일을 해본 일 있나

 

몸의 모든 무게를 떠받치며

하루하루 삭정이가 되어가는

그 하소연 소리를

사실 여태껏 모른 체해 왔다

 

괴로웠겠지 파란만장한

착취의 역사가, 나는 이제야

미안하다고 참 미안하다고

파스 붙이며 후 입김 불어준다

 

수평선

 

그대는 높고 나는 낮아도

 

그대는 높다 생각 안 하고

 

나도 낮다 생각 안 하는

 

어느 수평의 고른 지점에서

 

우리는 길게 고요하다

 

그대와 나 오래 평안하다

 

 

                                   * 시 : 김광렬 시집존재의 집(시작시인선 0358, 2020)에서

                                     * 사진 : 겨울 한라산, 사라오름 나들이(2016. 1. 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