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흰 눈 편지
흰 눈 위에 새 한 마리 총총 다녀가셨다
가느다랗고 앙증맞은 발자국을 새기고 가셨다
빼어난 곡선으로 멋들어지게 휘돌고 가셨다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고 쓰고 가셨다
밤새 눈 내리다 멈춘 이 하얀 아침
같이 맑게 돋아나는 해를 맞이하려다
시간에 쫓겨 그냥 돌아간 것은 아닐까 하고
지레짐작해 보는 집 가까운 그 공원 길
나도 거기 몇 줄 종종걸음을 남기고 왔다
내일이나 모레나 아무 날 때쯤
다시 눈 오는 날 때맞춰 우리 함께
하얗게 씻긴 새아침을 맞이합시다그려, 하고
♧ 제주 잠녀
바다 한복판에 피어나는 꽃,
저 꽃이 아름답다
뼈마디 바늘로 쑤시듯 아파도
해삼 전복 캐러 간다
오늘도 거친 물속
테왁에 몸 기대고
호오이호오이 토해 내는 힘겹고도 애잔한 숨비소리
내 어머니도 해녀였다
해녀 아닌 여인네 바닷가에서 살기 어려웠다
지금은 늙은이 해녀들만 가마우지처럼 모여 옹기종기 물질하지만,
제주 해녀들이 우리를 키웠다
눈물 숭숭 박힌 한숨이 고통이 뚝심이
우렁우렁 제주섬을 키워냈다
바다 한복판에 서슴서슴 피어나는 꽃,
검질긴 그 삶이
면도날 스미듯 가슴 아리다
♧ 비양도 저녁 바다 빛깔
저무는 하루해가 정성껏 짜서 깔아놓은 비단 천을 눈으로 밟으며 나는 바닷가에 섰다
언젠가 터키에 갔을 때 본 수제 융단, 보는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빛깔들이 현란했다
몇 겹의 다른 색실들이 얼마나 섬세한 조합을 이루었기에
층층이 달라지는 바다 빛깔을 떠올렸을까
가까운 곳에서 먼 곳까지 젖빛이었다가 연두색이다가 파란색이다가
거기에 노을빛까지 먹어 노란색 보라색 붉은색까지 어우러져 한데 어룽지는
헌데, 내가 본 그 형형색색의 빛깔들은 곧 어둠이 닥쳐오면서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또 다시 볼 수 없을까
그 저녁 바다 풍경은 판화처럼 찍어내거나 대량생산할 수 있는 빛깔들이 아니어서
딱 아까 아 하는 사이 허무하게 지나가 버린 그 찰나뿐,
정작 생애의 꽃 시절은 그리 길지 않다
길지 않아도, 잠깐이어도
한때 이 지상에 머물고 있는 내가 이렇게
숨 막힐 것 같은 비양도 저녁 바다 빛깔을 볼 수 있어서 더없이 행복하다
*김광렬 시집 『존재의 집』(천년의 시작, 202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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