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절기
마음을 거들어 주는 사람도 없이
서편 하늘은 언제 저렇게 붉어졌나
지난여름에 태워 버린 말들을 안주 삼아
비워낸 소주 몇 잔으로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잃어버리고 싶은 밤
가볍게 들려오는 뒷담화같이
가끔 흔들려도 흉이 되지 않는다고
잠시 쉬어 갈까
유혹하는 골목길 연인들의 대화들
단숨에 읽어내기 어려운 문장의 쉼표 같은
이 계절의 표현법을 해석하며
나도 골목의 빈방으로 숨어들고 싶다가도
또 아무 데도 묶이고 싶지 않은
나는 아무래도 틈이 많은 사람이다
♧ 당신, 이라는 기호
내 미간의 주름으로도
어젯밤 잠의 깊이까지 알아채었던 당신
쉽게 떠올려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어
모란꽃 하얗게 핀 봄날의 일기 속에
기호로만 남은 당신
당신에게 마음을 풀어놓는 일은
공중을 밟는 이음돌과 같아서
움푹, 몸이 빠지는 그믐밤과 같아서
물 흐르듯 흘러가면 된다는 말
길라잡이로 앞세워 가다가도
문득, 그 끝이 궁금할 때마다
품고 살았던 그 종점에
당신은 먼저 가닿았을까
귓속 사무치게
발자국 소리 멀어져 간 이후에도
이따금 흐느끼는 검은 새 한 마리
보랏빛 실타래 구름을 풀어
멀리 날려 보내는 새벽
나의 먼 곳은 바로 당신이었다
♧ 소나기
반쯤 쓴 문자 메시지
망설이다 지운 자리
무턱대고 다녀갔다
남남처럼 스쳐갔다
산수국 피어났을까
그 숲에 가자 했던 사람
♧ 봄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봄이었고
다시 밤이었다
창밖에 화르르 꽃이 지고 있었다
귀로 듣는 것이 더 좋은 풍경이었다
오늘 밤에는 정리해야 할 목록이나 적어볼까
가사는 좋지만 옥타브가 높아
따라 부르지 못하는 노래들이 떠오르고
마음을 주었으나 돌려받지 못한
사내의 얼굴도 스쳐간다
오늘 하루쯤은 미리 서러워하거나
무엇과도 화해하려고 애쓰지 말자
피었다 지는 꽃의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몸이 후끈 뜨거워지는 밤이다
♧ 빈 의자 하나 내어놓고
바다를 앞장세운 가마우지 발자국 따라
날개 없이 떠날 사람 붙잡을 말이 없어
온몸으로 출렁거리던 장다리꽃
때 이른 물아지랑이 피워 올리면
꽉 깨문 이별 앞에 미어지다 미워지다
뒤돌아 그리움만 품어 안은 섬, 우도
바다는 빈 의자 하나만 내놓았다
네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
풍경은 삼 년쯤 늙어 버렸다
♧ 봄은 또 덧나 - 홍경희
설레다 상상하다 저 혼자 헛물켠 봄
기대 없이 꽃은 피고 약속 없이 꽃은 지고
울음은 환한 날에도 수액처럼 차올라
아이들 노란 미소 등 뒤로 스쳐갈 때
미안하다 그 말에도 머리채를 잡히듯
중심을 잃어버린 바람 온몸을 훑고 간다
누가 투망질로 저 울음을 거둬올까
돋을새김 흉터에도 트실트실 움튼 싹
허공에 보고 싶단 말 손톱으로 쓰고 있다
♧ 새를 읽다
가을 하늘에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깃털 하나
팽팽하게 당겨졌던 푸른 현이 핑,
끊어진다
저 하늘 부려놓고 간 새
몸이 참, 가볍겠다
* 홍경희 시집 『봄날이 어랑어랑 오기는 하나요』(걷는사람, 2020)에서
* 사진 : 한라산에서 본 겨우살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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