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문장들은 덜그럭거리고, 어긋난
행간은 쉬 바로잡히지 않습니다
말을 줄이는 방식이
어렵다는 것을 다시 깨닫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간격을
좁히고 싶은
내 사사로운 몸짓에
詩는 응답해 줄까요
그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달빛을 켜 두는
겨울밤입니다
2020년 12월
홍경희
♧ 어느 아침의 문장들
쉰넷 생일 아침에
안면 없는 당신의 유고시를 만난다
하루치의 알약을 삼키고
하늘에 매달리려는 기대와
사람에 기대려는 문장의 실밥들을
한 올씩 풀어 헤치며 남겨 놓은 시편들
나와는 슬픔을 해명하는 방식이 다른
당신의 유언을 읽으며
매듭짓지 못한 문장을 많이 가진 나는
조금 무서워진다
씁쓸한 독백을 선물로 받는 생일이
한 번쯤 있어도 상관없겠지
문득, 고쳐 쓰고 싶은
그러나 끝내 바뀔 수 없을 것만 같은
나, 라는 문장들이 떠오른다
가끔 울음은 뻣뻣하게 경직된 어깨를
풀어주는 처방이 되기도 한다
♧ 점 보는 여자
당신의 입을 빌려 굳이 듣지 않아도
예감할 수 있는 내일의 운세
길하거나 흉한 일도 점점 무덤덤해지는
나이가 되어서도
나는 왜 점괘를 받아보고 싶은 것일까
남자로 태어났어야 할 사주
여자 몸으로 짊어지느라
깊은 잠은 잘 수 없는 날들이라 했다
그래도 쉰다섯 넘기면
맑은 날 웃으면서 맞이할 거라고 했다
점괘가 일러준 삼년이 지나는 동안
몰라서 손을 쓸 수가 없고
알아도 피할 수 없는 액운들이 더 많아
다시는 점집 마당 밟는 일이 없을 것 같다가도
오늘 또 나는 귀를 세우고 있다
낡고 닳아버린 좁은 길 따라 찾아올
귀인이 한 사람쯤 남아 있기라도 한 듯이
♧ 바늘엉겅퀴
숨이 멎을 듯한 순간 서너 번 있었다
과하게 뱉는 말도 병이라는 것 알았다
내 심장 열어서라도 보여 주고 싶은 그 흉터
♧ 매화
잊어라, 어제까지
깡그리 잊는 거야
한파 속에 새철 든 날
뜬금없이 나를 불러
삼세번 다짐을 받는,
붉은 종기 짜내는
♧ 밤비 봄비
그 누가 재즈풍으로 봄비를 듣자했나 무릎을 톡톡 툭툭 즉흥적으로 튕겨내자 정말로 말이 씨가 된 귀신같이 톡, 톡, 톡 차창 문에 변주를 맞추는 빗방울들 금세 올챙이 떼처럼 달라붙어 달린다 달린다 흩어지며 떨어지며 달린다 과속방지턱 넘어가며 허밍이 비틀린 순간 모세혈관 통과하며 내 몸속을 또 달린다 자정 넘어 메마른 바닥에 도착했다는 새순 같은 재채기 잇따라 자꾸 터진다 스웨터 올을 풀어 푸른 힘줄 다시 새긴 시詩를 기다리는 일도 이미 시들해져 버린 내가 봄비를 부른다고 이른 봄비 내린다고 봄날이 어랑어랑 오기는 하나 서둘러 밤비를 봄비로 불러 놓은 사람들은 자동차에서 내리자마자 제 집으로 돌아가고 마지막 내 몸속에 남은 채 내리지 않는 비 어떻게 하나 뒤편에 두고 온 것들 흠뻑 젖어 가고 돌아가 우산을 씌워줄 수 없는 나는 어떻게 하나
♧ 교정보는 여자
시 한 편 써 놓고는
잊어야 할 사람과 보고 싶은 사람이
여전히 한 사람인 동의어를 수정하다
혼자만 의미 부여한 반지를 빼 버리듯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찢겨져 종지부 찍은
불완전 사랑의 문장,
불이라도 긋고 싶은
*홍경희 시집 『봄날이 어랑어랑 오기는 하나요』(걷는사람 시인선, 2020)에서
*사진 - 알프스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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