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계간 '제주작가' 2020년 겨울호의 시(1)

김창집 2021. 1. 14. 00:10

흑룡만리* - 강덕환

 

일러준 대로 불어주지 않았다, 바람은

이레착저래착**, 저들도 밤새 뒤척였으리라

그래 놓고도 고스란히 지나치지 않았다, 바람은

숭숭 뚫린 담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설령

그렇더라도 바람아, 이 몹쓸 녀석아

돌담이 바람에게 욕하지 않았다

다만, 아귀가 맞지 않아 공글락***거리면

몇번이고 돌리고, 뒤집고, 빼고, 받치기를

서슴지 않았다, 오히려 돌담은

바람을 다스리고 길을 내주었고

바람은 모서리를 원만하게 다듬어

벗이 되고, 이웃이 되고, 마을이 되고

더욱 단단한 줄기를 이어갔다

마침내 꾸불텅꾸불텅 흑룡만리 역사를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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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의 돌담을 일컫는 별칭

** ‘이리저리의 제주어

*** ‘흔들거리다의 제주어

 

여전히 미국의 나라 김경훈

 

로버츠 미국 군사고문단장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작전 지휘권은 미국에게 있다고 말했다

 

로버츠는 여순항쟁 진압군에 전폭 지원해

1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한국군 현대화의 시발이 되었다고 말한다

 

로버츠는 제주43 초토화작전을 수행한

송요찬 연대장이 대단한 지휘자라며

대통령 성명을 통해 알리라고 말했다

 

로버츠라는 악몽은 지금도

평택 군산 성주 강정 금수강산에서

여전히 작전을 지휘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실 김규중

 

그대의 모습 한 부분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나의 모습 전부가

진실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세상이 단순했을 때

쉽게 드러내던 진실일지라도

세상이 복잡해졌을 때

쉽게 감추어지던 진실일지라도

 

중요한 것은

그대의 진실이 아니라

나의 진실을 지켜나가는 것

 

사소(些少)한 기억 김병택

 

수시로 내리는 비가 나의 오랜 동반자였음을

조용한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퇴색한 마루 난간에 걸터앉아 비내리는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수십 년 동안의 일을 기록한

문자들을 바라보았다

 

젊은 시절 내내 나를 휘청거리게 한 이유는

일기장의 한 항목만으로도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느리게 찾아온 어느 겨울날, 불투명한 모습의

바람과 구름과 추위가 집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나는 처마 밑에 서서, 울타리 너머 길 위에

둥둥 떠 있는 또 하나의 를 집안으로 끌어당겼다

 

어느 겨울날은 이후에도 여러 번 나를 찾아왔다

 

어머님 전 상서 김수열

 

불효자 상길입니다

철창 사이로 차오르는 달빛이 그윽합니다

물소리 풀벌레소리도 어제처럼 잔잔합니다

가족들 두루 여여하신지요?

저도 삼시 세끼 부족함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님

충과 효는 양립할 수 없다는

성현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깁니다

조국을 택하면 집안을 버려야 하고

가족을 택하면 민족을 버려야만 하는 시대입니다

다만 선택의 기로가 조금 일찍 제게 왔을 뿐입니다

제가 선택한 길, 후회도 미련도 없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였고 그게 나였을 뿐

두려움도 아쉬움도 없습니다

새벽이슬처럼 영롱하고 고요합니다

그저 식구들에게 미안하고

뜻을 함께 한 동지들에게 송구한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님

날이 새면 저는 먼 길을 가야 합니다

그 끝자락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기에 외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따뜻하고 포근해집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통일된 조국을 보지 못함입니다

더 큰 용기와 더 큰 결단이 부족했던 제 탓입니다

 

어머님

그리움은 그리운 대로 그냥 두고 떠나겠습니다

먼 훗날을 기약한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겠습니다

살육과 광기의 공포가 없는 맑은 세상에서 어머님을 기다리겠습니다

이승의 꽃산천 훠이훠이 유람하시고 여유롭게 오시기 바랍니다

죄 많은 불초소생이 저승의 동구 밖에서 마중하겠습니다

그날까지 아름다우시고 여유로우시길

 

어머님,

어머님은 저의 첫사랑이자 끝사랑입니다

 

무자년 922

장남 문상길 올림

 

 

                                   *계간 제주작가2020년 겨울(통권 71)에서

                                 *사진 : 눈 쌓인 돌문화공원의 초가마을에서(김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