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2021년 1월호의 시(2)

김창집 2021. 1. 13. 01:05

한계령을 넘으며 - 오영자

 

온몸에 한기를 느끼며

그 몸의 발열이 시작되었다.

태양을 가슴에 품은 몸은

그 뜨거운 열기를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다.

저 발끝에서부터 차오르는 차가움

제 몸의 붉은 열을 이마에 이고

설렁이는 몸만 바람에 흔들릴 뿐

파르르 떨지 않는다.

온 산이 누웠다.

어둠의 빛도 모두 누워 허리를 기댄다.

먼 곳에서부터 실려 온 채우지 못한 빈약한 바람은

또 다시 어딘가를 향하여 가고 있다.

내가 실려 가는 것이다.

채 넘어오지 않은 산의 굴복에

모두가 마음을 내세운다.

구불구불 나무가 길을 따라 돌아눕기 시작한다.

공허한 마음에 빛을 찾아 가고 있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제 몸의 힘을

빛으로 발하며 온몸이 넘어간다.

한계령이 내 뒤로 넘어가고 있다.

 

겨울 산에 와서 채영조

 

눈 덮인 겨울 산을 걸어도

마음이 정갈해지지 않는 것은

지나온 날들이 욕심과 시기로

가득 찼을 것이다

가야 할 길이 저 눈길처럼

투명하고 순결한 것만은 아니지만

귓가에 스치는

바람의 숨결 따라 나서는

삶의 나들이는

종일 피로하여도 행복하겠네

한때,

물질과 탐욕이 인생의 전부였으나

겨울 산에 와 보고 알았네

세상에 홀로 서 있어도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다는 것을

 

- 박문희

 

작은 텃밭에 무를 심었다

 

파릇한 풍경이 싹텄다

가지런히 병렬하듯 줄지어 선 모습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북돋아 준 흙에서

뿌리 잘 내릴 수 있게

무를 토닥여도 주고

서로의 아픈 잔등 긁어주며 깊어질 수 있게

조금 덜 자란 무

많이 자란 무

없게 솎아도 주었다

 

무는 가늘게 썰려 묵사발 안에서 아삭거리다

무는 고등어 아래 숨죽인 채 납작 엎드려 몰캉거리다

소복소복 눈 내리는 날

따듯한 한 그릇의 국으로 놓여

모락모락 온기로도 핀다

 

바람 들까 빈틈은 허락하지 않는다

 

누가

무를 한낱 푸성귀라 무시할 수 있는가.

만년 조연이라 할 수 있을까

 

무를 뽑아 무를 꼭꼭 묻었다.

 

종이컵 윤순호

 

책가방이 잠시 해방을 꽂고

쫑알쫑알 수다를 빨아대던

귀여운 주스들이

 

테이크아웃

컵 입술이 다 번지도록 홀짝거리던

미시족 립스틱 라떼들이

 

뼈다귀 해장국집

후식으로 따라온

개운한 서비스 커피가

 

골목 파라솔 탁자에

세월을 마신 막걸리, 노인들

신트림이

 

………………

 

한길가 일렬 주차장 구석지마다

찌그러진 1회용 양심이 널브러져 있다

 

화형식 - 김혜천

 

흰 나비가 나풀거리며 내리는 폐교 운동장

 

메마른 한 무리의 짐승들이

 

엇갈리며 쌓은 나뭇더미에 불을 지핀다

 

작은 불꽃이 나뭇가지의 중심에서 조용히 일어나

 

일렁거리며 피어오르는 몽상의 밤

 

삼킬 듯 일어난 불

 

지푸라기처럼 삼켜버린 자작나무 숲

 

깊고 어두운 동굴에서 뛰쳐나오라

 

동굴나방 한 마리가 불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진다

 

흔적 없이 타지 않고는 다시 시작할 수 없다

 

새로운 서사를 불태울 공간을 향해

 

쓸쓸하고 높고 아름다운 모험을 향해

 

재를 털고 날아가는 나비

 

좁쌀알만 한 - 차영호

 

내 양 귓바퀴 한복판에 하나씩

좁쌀알만 한 게 뾰족 돋아있다

 

아부지는 종종

자식의 어린 귀를 만지작만지작

만지작

 

훌쩍 자란 내가 객기를 부리면

잠자코 손을 이끌어

당신 귓바퀴를 더듬게 하셨다

 

나도 모르게

눈물 도토리팽이를 팽 돌리는

 

묵언

 

……귓바퀴 좁쌀은 아무 가문에나 있는 게 아니니 분명,

분명 너는 내 아들,

내 아들이 그러면 쓰나

 

장승 눈방울보다 더 깊이

새기고 계셨던 것이다

 

 

                                                 *월간 우리202101391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