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계령을 넘으며 - 오영자
온몸에 한기를 느끼며
그 몸의 발열이 시작되었다.
태양을 가슴에 품은 몸은
그 뜨거운 열기를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다.
저 발끝에서부터 차오르는 차가움
제 몸의 붉은 열을 이마에 이고
설렁이는 몸만 바람에 흔들릴 뿐
파르르 떨지 않는다.
온 산이 누웠다.
어둠의 빛도 모두 누워 허리를 기댄다.
먼 곳에서부터 실려 온 채우지 못한 빈약한 바람은
또 다시 어딘가를 향하여 가고 있다.
내가 실려 가는 것이다.
채 넘어오지 않은 산의 굴복에
모두가 마음을 내세운다.
구불구불 나무가 길을 따라 돌아눕기 시작한다.
공허한 마음에 빛을 찾아 가고 있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제 몸의 힘을
빛으로 발하며 온몸이 넘어간다.
한계령이 내 뒤로 넘어가고 있다.
♧ 겨울 산에 와서 – 채영조
눈 덮인 겨울 산을 걸어도
마음이 정갈해지지 않는 것은
지나온 날들이 욕심과 시기로
가득 찼을 것이다
가야 할 길이 저 눈길처럼
투명하고 순결한 것만은 아니지만
귓가에 스치는
바람의 숨결 따라 나서는
삶의 나들이는
종일 피로하여도 행복하겠네
한때,
물질과 탐욕이 인생의 전부였으나
겨울 산에 와 보고 알았네
세상에 홀로 서 있어도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다는 것을
♧ 무 - 박문희
작은 텃밭에 무를 심었다
파릇한 풍경이 싹텄다
가지런히 병렬하듯 줄지어 선 모습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북돋아 준 흙에서
뿌리 잘 내릴 수 있게
무를 토닥여도 주고
서로의 아픈 잔등 긁어주며 깊어질 수 있게
조금 덜 자란 무
많이 자란 무
없게 솎아도 주었다
무는 가늘게 썰려 묵사발 안에서 아삭거리다
무는 고등어 아래 숨죽인 채 납작 엎드려 몰캉거리다
소복소복 눈 내리는 날
따듯한 한 그릇의 국으로 놓여
모락모락 온기로도 핀다
바람 들까 빈틈은 허락하지 않는다
누가
무를 한낱 푸성귀라 무시할 수 있는가.
만년 조연이라 할 수 있을까
무를 뽑아 무를 꼭꼭 묻었다.
♧ 종이컵 – 윤순호
책가방이 잠시 해방을 꽂고
쫑알쫑알 수다를 빨아대던
귀여운 주스들이
테이크아웃
컵 입술이 다 번지도록 홀짝거리던
미시족 립스틱 라떼들이
뼈다귀 해장국집
후식으로 따라온
개운한 서비스 커피가
골목 파라솔 탁자에
세월을 마신 막걸리, 노인들
신트림이
………………
한길가 일렬 주차장 구석지마다
찌그러진 1회용 양심이 널브러져 있다
♧ 화형식 - 김혜천
흰 나비가 나풀거리며 내리는 폐교 운동장
메마른 한 무리의 짐승들이
엇갈리며 쌓은 나뭇더미에 불을 지핀다
작은 불꽃이 나뭇가지의 중심에서 조용히 일어나
일렁거리며 피어오르는 몽상의 밤
삼킬 듯 일어난 불
지푸라기처럼 삼켜버린 자작나무 숲
깊고 어두운 동굴에서 뛰쳐나오라
동굴나방 한 마리가 불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진다
흔적 없이 타지 않고는 다시 시작할 수 없다
새로운 서사를 불태울 공간을 향해
쓸쓸하고 높고 아름다운 모험을 향해
재를 털고 날아가는 나비
♧ 좁쌀알만 한 - 차영호
내 양 귓바퀴 한복판에 하나씩
좁쌀알만 한 게 뾰족 돋아있다
아부지는 종종
자식의 어린 귀를 만지작만지작
만지작
훌쩍 자란 내가 객기를 부리면
잠자코 손을 이끌어
당신 귓바퀴를 더듬게 하셨다
나도 모르게
눈물 도토리팽이를 팽 돌리는
묵언
……귓바퀴 좁쌀은 아무 가문에나 있는 게 아니니 분명,
분명 너는 내 아들,
내 아들이 그러면 쓰나
장승 눈방울보다 더 깊이
새기고 계셨던 것이다
*월간 『우리詩』2021년 01월 391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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