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시] 봄은 - 신동엽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 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 녹이듯 흐물흐물
녹여버리겠지.
♧ 오독誤讀 - 임보
새벽에 배달된 조간을
낡은 스탠드 밑에서 읽는다
「짚신사리」라는
괜찮은 시가 하나 눈에 띄었다
그런데
제목과 내용이 어울리지 않아
의아해 하고 있는데
아내가 큰 전등을 켜 준다
그러자
「짚신사리」가 「진신사리」*로
환생, 부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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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신사리」: 홍사성의 시.
♧ 목련꽃 빛에 - 정순영
하얀 목련꽃이 눈부시게 피어
어두운 세상을 밝히네
욕망의 거리를 자맥질하던 사람들이
옷가지를 벗어 던지고
목련꽃 빛에 알몸을 씻네
올려다보는 파란 하늘에서
윤슬 같은 목소리가 반짝이며 들려오고
세마포를 입은 겨드랑이 가렵더니 날개가 돋네
♧ 꽃에게로의 망명 - 김세형
작년 봄꽃들이 올봄에도 피었구나.
어김없이 화사하게 피었구나.
내년 봄에도 다시 피어나겠구나.
꽃들은 탄핵당하지 않는구나.
꽃들의 법치주의는 무너지지 않았구나.
꽃들의 공화국으로 날아가고 싶구나.
나비처럼 망명하고 싶구나.
♧ 동백꽃 – 채들
활짝 웃으며 살아야지
질
때
도
미소 잃지 말아야지
♧ 뿌리의 힘 - 김완
오랜 세월을 이겨낸 뿌리는 거대하다
돌 틈으로 스며들어 돌과 더불어
단단하게 붙어버린 뿌리들 무등산
꼬막재 오르는 길을 수맥처럼 흐르고 있는
어떤 뿌리들은 땅 위로 솟구쳐 나와
숱한 역경의 시간을 무심하게 건너온
그들의 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편백나무 숲 그늘 속에 들어서면
시원한 바람이 인간의 번뇌를 씻어준다
이미 부처가 된 편백나무숲의 나무들이
어리석은 이에게 달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간의 기억이 저장된 목소리는 쉬이
들을 수 없다 수만 개의 무성한 나뭇잎들이
세월을 기억하는 나무의 눈이다 그들은
한 해 동안 살면서 본 것들을 뿌리에 저장하고
이듬해에 나올 잎들에게 역사를 이어준다
오래된 나무는 천수를 누린 노인의 얼굴이다
그를 버티게 한 것은 뿌리의 힘이었을 거야
*월간 『우리詩』2021년 03월호(통권 제393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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