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우리詩' 3월호의 시와 히어리

김창집 2021. 3. 13. 11:53

, 무덤 - 김완

 

겨우내 사람 구경하기 어려운 외진 산길

무너져 내리는 늙은 무덤 한 기 서 있다

그늘 사이로 을씨년스러운 바람만 드나드는 곳

때가 된 봄은 어김없이 찾아와 무덤가에도

동백꽃 피고, 산벚꽃 분분분 흩날린다

무등산 토끼등 올라가던 청춘 남녀

무덤을 바라보고 앉아 봄을 마시고 있다

청춘은 아무런 장식 없이도 저리 빛나는데

쓸쓸한 무덤은 언제부터 허물어져 갔을까

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간 세상

그 많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마을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둘러앉아

가난의 껍질 벗겨먹어도 맛 좋던 감자

하하호호 풍경은 엊그제 일인 듯 생생한데

흙 한 줌 부스스 흘러내린다

한 세상 건너 꽃이 지고 바람 부는 봄이다

 

묵언 마선숙

 

삶의 페이지

얇아지고 있다

 

사라지지 않는 멍울들

검버섯

 

생에 환멸 느꼈을까

환자용 알약 크기만큼

 

색칠 거부하는 검은 꽃

완강하다

 

내가 묵언하면

검버섯은 저 홀로 소란스럽다

 

나보다 먼저 세상으로 나간다

덧니 같은 애교도 없이

 

땅에 가까워지는 날

민들레 씨앗 되어 날아가리

 

파란 하늘엔 별이 뜨지 않았다 김종욱

 

품속에 품고 기르던

푸른 매의 날개가

뺨을 찢어 놓고 날아갔다

찢긴 하늘 벌어진 상처에

노을이 물들 때

눈을 감았다

두 눈에서 뚝 뚝 별들이 떨어졌다

 

고문 - 나영애

 

눈보라 속

꽃다발을 품고 온다

현관부터 봄의 미소가 피어난다

향기를 오래 붙들어 볼가

 

잘라온 허리 다시 자르고

뜨거운 물에 집어넣었다 찬물 꽃병에 꽂고

링거 한 방울 위로하여

텔레비전 옆에 놓는다

생의 마지막 몸부림 향을 뿜어 낸다

 

다음날 그 다음날도

자르고 링거 투여

생명을 붙들어 놓을 것이다

꽃들의 왁자한 비명

 

봄을 보고자 했던 성급함이

고문이었구나

오는 봄을 진득하게 기다렸어야 했다

 

무지 - 박용진

 

최고라고 생각하고

무지拇指*를 내밀었어

 

바람 앞에 스러지는 이 모든 것

 

무지無知했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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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 : 엄지.

 

눈 내리는 강 - 정재원

 

상활리 마을 어귀로 날리는 눈

 

등줄기가 포근포근

마을로 가는 길은 환하고요

 

나뭇가지 건너다니고

뭉클 피어나는 언덕이

함께 걸어 들어갔을 토담집

아이들이 마당 가득 뛰어다녀요

 

안방엔 남포등 미리 켜지고 있을 테고요

썰매 지치다 젖은 양말 오빠는 동생들과

불에 말리고 있을 거고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눈을 뭉쳐 던져요

 

눈을 뭉쳐 어머니에게 던지는

아버지 하얀 나무 아래

우리들이 박수 쳐요

 

하얀 텃밭 고랑 없애는 복실이

춤을, 추기 시작해요

갑자기 사라지는 얼굴들

식당 창밖 하얀 눈꽃이

 

보릿고개 넘어 김석규

 

아침에 눈 뜨면 어머니가 제일 먼저 하시는 소리

시계 밥부터 줘라

벽시계 유리문 열고 나비 모양의 쇳조각 꺼내

또르르 또르르륵 태엽 감아 고봉밥 퍼 담던

이제서는 걸어서는 갈 수 없는 먼 날의

가난을 불 지르다 죽어간 사람들

모질게도 흉년 든 그해 보릿고개

희멀그럼한 풀죽 숟가락으로 저으면

하늘의 별들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던가

피죽바람 속으로 세떼들 푸드드 날아올랐던가

 

 

  * 월간 우리3월호(통권 제393)에서

  * 사진 : 어제 찍은 자배봉의 히어리(조록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 한국 특산종으로 지리산 일대에 서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