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雪峯 장영철 화백에게 - 洪海里
설봉 자네는 북이고 북채였다
한평생 북을 치며 허공을 울었다
화선지에 맨발로 뛰노는
붓이었고 먹이었다
호탕한 웃음이 울음이었고
울어 쌓는 슬픈 웃음이었다
자네는 술이었고 물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흐르고 흘러
이제는 산봉우리를 눈으로 덮어
雪峯이 되었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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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 장영철 화백이 2021년 2월 25일 소천했다.
오랫동안 우리시회 행사 때마다 북과 소리로 우리를 즐겁게 해준 고마운 친구였다.
설봉, 잘 가시게!
부디 극락왕생하시게! _()_
♧ 주정主靜 - 김영호
세상의 소음 속에서 진실이 그리워지네.
세상의 어둠 속에서 빛이 그리워지네.
그러나, 새해의 첫 비가 내리네.
새해의 첫 비가 내 몸 속으로 내려와
내 심혼心魂을 잔잔한 호수로 만드네.
빗물이 나의 속정俗情을 정화하니
내 안에 성령이 임하고 사랑이 충만해지네.
내 안에 사랑이 충만하니 내 안이 고요하네.
내 안이 고요하니 만물이 나를 사랑함이 보이네.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이 나를 사랑하고
안개와 비 그리고 구름이 나를 사랑함이 보이네.
산을 오르지 못하니 산이 내게로 내려와 주고
나무들이 나와 함께 동네를 산책해주네.
내 안이 고요하니 우주가 고요하고
마른 화초들이 속삭여주네.
새해 첫 비에 속진俗塵이 다 씻기어
내 영혼이 주정主靜에 들으니
삼라만상이 나를 사랑하고
나도 우주만유를 사랑하네.
찬바람이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가
독수리로 날아오르네.
♧ 댄스 단스 땐스 - 정옥임
어디서 봤더라
바다 한 가운데서
꼬리 틀어 하늘하늘
숑 솟구쳐 추던 생춤
기름통에 퐁
날갯짓 비틀림
지느러미 꼬리 붙잡기
하얀 뽀얀 살
간 쓸개 부래 똥집
뼈까지 다 발라낸
허물만 남은 껍데기
오그라지고 뻗대며
펄펄 끓는 180도
열탕에서 비틀리는
명태의 겉옷
펼쳤다 당겼다
지글지글 박자 맞춰
댄스 딴스 땐스
빠지지지직 빠사사사삭
온 몸으로 뱉어내는
마지막 숨비소리
♧ 얼음새꽃 – 도경희
옷 벗고 회초리가 된 물푸레
눈물 아린 내 설움 후려치는가
혹한의 마음이 박하꽃처럼 환해진다
하마 얼음새꽃 피는가 어느 대지에
더움 숨 내 뿜으며
모락모락 올라오는 아지랭이
땅에 떨어진 별
청순하고 웃음 끝 맑은 그대는
연분홍 가슴만 열고
제 몫을 견디며
연서를 적는 오늘은
종이비행기 높이 날아라
♧ 멍텅구리 – 이제우
길을 걸으면서
길을 찾는 순례자
소를 타고 가면서
소를 찾는 목동
인생길을 가면서
온 곳도 모르고
가는 곳도 모르는
나는야, 숙맥이요
천하의 멍텅구리
♧ 사는 이유 – 장우원
물고기를 잡아서 팔 것도 아니고 끓여서 먹을 것도 아닌데 그는 매주 낚시를 간다
손맛이 곧 인생 대쾌大快라고 말하는 그를 무슨 거사居士처럼 대접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깊이를 누가 설명 좀 해주면 좋겠다
낚시를 가는 목적이 무엇인지 낚시를 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낚시를 왜 하는지 보이는 게 다가 아니고 만지는 게 다가 아니라는 말은 빼고 말이다
주 5일의 노동은 낚시를 가기 위한 밑밥이라는 그의 삶이 가끔은 부러워지는 이유를 나도 이해하며 살고 싶다
♧ 적요의 밤 - 임보
적요의 밤
내 등이 가렵다
히말라야의 어느 설산에
눈사태가 나는가 보다
적요의 밤
귀가 가렵다
남태평양의 어느 무인도에
거센 파도가 이는가 보다
적요의 밤
잠이 오지 않는다
내 은하계의 어느 행성에
오색의 운석들이 떨어지고 있나 보다
적요의 밤
어디선가 밀려오는 향훈…
내가 떠나왔던 아득한 전생의 종루에서
누군가 지금 종을 울리고 있나 보다
*시 : 월간 『우리詩』 2021년 4월호(통권 제394호)에서
*사진 : 모과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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