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산림문학' 2021년 봄호의 시

김창집 2021. 3. 31. 19:37

봄날 오후 - 김귀녀

 

성거산 오르는

북쪽 산비탈에 띄엄띄엄

진달래가 피었다

해쓱한 얼굴이

나를 닮았다

내려오는 길

한적한 들길엔

참새 떼가 우르르 우르르 몰려다니며

짹짹짹

짝을 찾는 울음소리들 같아

이맘때면 들리는 소리

앙증맞은 목소리

보통 때와 다른 소리

구애를 하는 소리

청춘! 무엇이든 좋아

까르르 까르르 웃었던

그때 같아

그 따뜻한 봄날

그 봄 날 오후

 

봄날 이운移運 - 김혜천

 

모래로 통증을 채운 재첩껍데기

강이 내어 놓은 허벅지에 누워

 

멀리 잔설 쓰고 어깨를 맞댄 산맥의

너그러운 침묵을 올려다본다.

 

해동의 날 찾아와

시원의 물 넘쳐흘러

 

지리산 골골 아직도 감지 못한 눈

말라붙은 피딱지 씻겨

감기고 나면

 

열풍처럼 들끓던 아우성

골짜기마다 웅웅 대는 피 울음

모두 불씨 되어 흥건한 숲을 이루리

 

한 묶음 횃불을 들고

어둠의 묻혔던 숱한 날들을 일으켜

활활 타는 꽃불 능선을 따라

스무 살 가여운 넋

꽃상여, 꽃상여로 이운移運 하리라

 

, 멀리서 들리는 말발굽소리

오방색 발자국 수놓으며 달려오는

 

텃골에 와서 - 이명

 

처마 밑에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 있는 집은

보기만 해도 따뜻하다

 

불을 품고

바람벽에 기대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나무들은 또 얼마나 선한가

 

버려져 있는 나무보다 선택되었다는 마음에 안도하듯

틈새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장작은 서까래까지 닿아 있고

영혼들은 자유로운데

언제부터 나무들은 제 몸을 태울 생각을 했을까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몸속에 남아 있는 한 톨의 습기마저 돌려드리며

세월을 둥글게 말아가고 있다

 

나는 늘 쓰임새 있기를 기대했으나

여름이 가고

또 가을이 가고

선택되기 위해 몸부림쳤던 날들도 다 보내고

한계령 너머 계절의 끝자락에 와 있다

 

사람들은 왜 거기까지 갔느냐고 말을 하지만

뜨거운 것이 사랑이라면

부풀어 오르는 것은 그리움이라 해야 하나

 

처마 아래 장작 곁에서

고요히 부풀고 있는 한 독의 술

이제,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을 것 같다

 

발화를 기다린다

 

은행나무 아래 비닐하우스 그 집 - 김주혜

 

개발제한지구 비닐하우스

혼자 사는 마리아 할머니는

자유당 시절 이야기만 꺼내면 신이 난다.

토평동 벌말에 들어온 지 40여년

자식 하나 낳아보지도 못했으나 영감님과 함께 심은 은행나무는

해마다 잉태하여 지천에 깔린 자식들로 다복하다.

당대 최고 정치인들과 교류하고 장안에 손꼽히는 멋쟁이 영감님과

고대광실에 스란치마 끌며 명동을 누볐으니

지금의 비닐하우스 집은 남은 생의 덤

매주 수요일이면 할머니의 꼬부라진 허리도 펴지고

꺼져가는 목소리도 힘을 얻는다

행여 잊혀질까 두려워 꽁꽁 싸매둔 지난세월

풍성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면

방문객인 나와 함께 장막을 젖히고

허리 굽혀 들어온 햇살과 내게 들려 보낼 까만 비닐봉지 안

은행알과 은달래, 비단냉이들도 귀 쫑긋하는

사랑과 평화가 있는 곳.

 

봄의 비밀 - 김인숙

 

봄 마중 나온 감나무 밑

봄을 위해

겨울동안 묻어둔 식량들의 무덤이

늦은 계절의 갈증을 채우며

봉긋하게 솟아올랐다

 

한 여름 그늘을 빌려

친구와 처음으로 거짓말의 싹을 틔웠던

감나무 아래, 불룩한 구덩이

그 구덩이를 헐어내자 봄도 겨울도 아닌 지난가을이

무덤 같은 구덩이 속을 견디고 있었다

긴 겨울 가짜 잠인 듯, 죽음인 듯,

온 몸이 쭈그러든 채

구덩이 속으로 숨어든 봄에 쫓겨

제 몸에 빨대 꽂고

천지분간도 못하고 싹을 틔워놓고 있었다

봄에게 멱살 잡혀 끌려나온 한 알 감자 싹이

싸리나무에 꿰인 달달한 봄이

감나무 빈 가지 끝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꿩의바람꽃 - 김내식

 

꽃도 생각을 하네

하나의 구름이 지나가고

다음 구름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틈새가 존재하고

그 틈에 하늘이 문을 열고

햇살을 비출 때는 기분이 좋아

얼음 속에서 하늘로 솟아

화들짝 꽃을 피운다

침묵의 샘에 뿌리를 두고

무아의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는

구름도 아름답고

물소리도 아름답고

바람에 몸을 맡긴 생각은 더욱 아름다워

푸드덕 꿩처럼 날아간다

희고 가늘고

맑은 향기로

 

 

                                          *산림문학2021년 봄호(통권 41)에서

                                                        * 사진 : 수수꽃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