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이 척산南二尺山 - 洪海里
고조부님 고조모님과 산이 되어 계시고
증조부님 증조모님과 뫼가 되어 계시고
할아버님 할머님과 언덕이 되어 계시고
아버님 어머님이랑 오름이 되어 계신 곳,
척산촌수尺山寸水라도
나도 산이 되고 싶어,
산속으로 들어가
아름다운 풍경이 되고 싶어.
타향으로 떠돌다 돌아오면
포근히 감싸주는 어머니의 품.
고향이란 가슴속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 그 향기 같은 곳.
내 고향
남이 척산.
---
* 내가 태어난 곳은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척산리 472번지인데 지금은 청주시로 되어 있다. 집 뒤 선산에 부모님, 조부모님, 증조부님과 고조부님을 모신 산소 네 기가 자리 잡고 있다.
♧ 가슴 - 김영호
한 해가 저물어 가면
미루나무에게 눈길이 닿아 오래 머무네.
그는 무언가 부족한 나무 같아서네.
화려한 꽃도 열매도 맺지 못하는 나무
생의 갈증이 있는 듯 모가지를 길게 빼고
늘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네.
미루나무는 그 몸 5할이 모가지이네.
그렇네.
사람도 부족한 사람에게 더 가슴이 닿네.
글도 부족한 글에 더 가슴이 닿네.
새도 외로운 새에게 더 가슴이 닿네.
학생도 부족한 학생에게 더 가슴이 닿네.
부족한 사람이 더 사람 향기가 풍기네.
부족한 글이 더 인간적이네.
새도 가련한 새가 더 가련한 아이 같네.
그렇네, 가슴은 슬픈 사람의 어머니이네.
부족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안아 꽃이 피네.
나무는 부족한 사람에게 더 기우는 사람이네.
저 부족한 듯한 미루나무, 아마도
코로나병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를 위해 기도하리라.
그렇네, 예수님도
부족한 사람들을 품어주기 위해 해마다 태어나시네.
♧ 저물녘의 폐광 - 박복영
죽은 자의 함몰된 눈에 어둠이 고인다
소리도 불빛도 모두 묻혀 촛불을 들고 들어서면
번쩍, 눈 뜬 눈동자가 될 것 같은
발설이 목젖에 걸린 거미의 방
어둠은 무덤으로 가는 길이어서
서늘한 바람에 거미줄이 튼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까맣게 쌓이는 어둠
나는 누구를 찾아가는 것일까
어쩔 수 없이 삼킨 긍휼矜恤
참을 수 없다는 듯 박쥐떼를 쏟아낸다
부욱, 뜯어진 고요를 핥는 달빛이 어둠을 거절하자
한결 홀가분해진다
바람을 들이자 뒤척이는 그림자는 죽은 자의 소유여서
저 방엔 아무 말도 새길 수 없다
♧ 싱싱한 꿀 - 박문희
고흥 과역에서 겨울꽃이 한 다발 도착했다
바다내음 그득 담겨 왔다
시집오던 해 꿀을 보낸다기에 받아 보았더니 꽁꽁 동여맨 비닐봉지에서 굴이 나왔다
형님 이건 가짜 꿀인데요, 웃으니
음마 진짜 자연산인디, 나가 한나씩 따서 깐 건디
짧은 겨울 해가 꿀꿀한 이른 아침 바닷가에 나가 윙윙 분주히 굴을 따 앙다문 입술을 두드려 우윳빛 속살들을 깨웠을 그녀다
삶은 아직 밀물 썰물이 수시로 드나드는
날것이라 조심스레 가끔 싱싱한 안부만 전할 뿐이다
이잉, 엄마는 잘 있제이, 나가 딸 노릇도 못 하고
말끝을 흐리다가는
우리 동생 이쁘다, 이뻐
그날 저녁 밥상에 오른 꿀은
입안 가득 육즙이 터져 나와 온통 끈적거렸다
♧ 춘래 유감 – 장우원
봄은 왔는데
산비둘기 왜 저리 들이우는가
연둣빛 새싹 너머
추이에 말라죽은 가지만 보이는가
벌써 왜 이순인가
♧ 치유治癒 - 윤태근
왠지 이렇게 춥고 서럽고 아린 때면, 한 마리 곰이 되어 둥치 밑 동굴을 찾는다. 높직한 공중에 마련한 콘크리트 동굴에 숨어,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터널도 폐쇄한다. 두터운 커튼으로 해님 달님과도 이별한다.
내 숨소리만 헤아리다가 몽유병 환자처럼 몸속 깊은 잠행을 떠난다.
어둑한 동굴들.
몇 날을 헤매고 헤매 가장 깊고 낮은 곳에, 발가벗고 웅크린 작은 녀석을 찾아낸다. 피 흘리는 가슴을 안고 잔뜩 겁에 질린 눈으로 응시하는 녀석.
-이젠 괜찮아, 다 지나간 일인 걸. 나를 봐. 내가 있잖아.
가슴으로 파고드는 녀석을 온 몸으로 감싸 안는다. 내 혼과 엉겨 함께 곤히 잠들어 있는 녀석을 본다. 창백하게 야윈 얼굴엔 눈물 자국이 선명하다. 들여다보고 또 보다가, 새끼와 어미 곰처럼 서로의 심장을 듣는다.
배시시 눈 뜬 작은 우주. 이젠 춥지도 서럽지도 아리지도 않다. 해맑은 웃음이 건강하다.
우주인같이 자유롭게 유영하는 녀석을 뒤로 하고 동굴을 나선다.
이제 나의 봄날이 왔으리라.
커튼을 확 열어젖히니, 해님 달님이 왈칵 안기며 봄이 깊었다고 속삭인다. 터널을 조심스럽게 타고 내려 현관 밖을 나서는데, 달콤한 기운이 내 폐를 찔러댄다.
♧ 고사목 – 이수미
지는 노을에 고요히 물드는 고사목
허허로운 위엄 깃들어 있어
지나는 발걸음도 스스로 낮아지는데
속이 비어 삭아버린 앙상한 가지
숭숭 뚫린 남은 살점마저 벌레들에게 내어주고
선 채로 열반에 들어 숙연하기만 한데
오늘도 구부러지고 뒤틀린
상처투성이 옹이 흔적 끌어안고
세상의 한 귀퉁이를 지키고 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의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 월간 『우리詩』2021년 4월호(통권 394호)에서
* 사진 : 자목련
'아름다운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洪海里 시 속의 봄꽃 (0) | 2021.04.24 |
---|---|
계간 '제주작가' 2021년 봄호의 시조 (0) | 2021.04.20 |
월간 '우리詩' 2021년 4월호의 시(1) (0) | 2021.04.04 |
'산림문학' 2021년 봄호의 시 (0) | 2021.03.31 |
김연미 '골목의 봄' 외 6편과 으름 꽃 (0) | 2021.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