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목의 봄 외 6편 - 김연미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직선의 도로 날에 잘려 나간 마을안쪽
윤색된
기억의 빛깔은
늘 찬란한 봄이었다
생애의 비밀문자 주름살로 위장하고
자벌레 걸음으로 시간의 경계를 넘는
할머니 뒷모습에도 나른함이 따르고
여기서 거가까지
몇 생을 돌아가야 할까
작아지던 골목이 한점 점이될때
터질까
사라져버릴까
꽃망울 만개한 봄
♧ 올레, 외로움의 시작점
살짝살짝 엿보다 마당까지 들어와 버린
결명자 서너 포기
엉거주춤 서 있다
돌담 위 틈을 엿보던 콩 넝쿨도 내려오고
초침처럼 오가던 발자국이 멈추고
고장 난 시계처럼
정지된 풍경 속으로
구부정 가을이 홀로 빈 유모차 끌며 가고
길은 늘 외로움에 시작점을 찍었지
발자국을 지우며
뿌리 내린 풀잎 사이로
황갈색 바람 한 줄기 시작점을 또 찍어.
♧ 너울성 파도
바람 불지 않아도 파도는 높았다
태풍 예보만으로도 꽃잎을 오므리며
갯바위
갯메꽃들이
파르르르 버티고
선심성 입김에도 입장 바꾼 기압골
회전교차로 도는 동안 방향을 또 잃었나
막아선
현수막들이
갈기갈기 찢기고
태풍의 눈동자가 정수리를 노릴지 몰라
비껴간 경로에도 불안한 하늘의 뜻
신산리
앞괴 바다가
경계선을 긋고 있다.
♧ 업사이클링
맞짱은 맞짱으로
지천명의 이 봄날
징검돌 두어 개 놓고 문득 길이 끊겼나요
바람이 흔드는 대로 손을 놓아도 좋아요
긴 머리 시니어 모델 당당하던 워킹처럼
떨어질 땐 고딕 풍으로
타협 없이 가세요
두 번째
꽃을 피우는
낙화들의 업사이클링
♧ 닫혀 있다
폭풍우 심한 밤을 겨우 지난 다음 날 아침
해가 뜨는 방향으로 사람들은 떠났다
어디쯤 놓쳤던 걸까
따라나설 수 있던 지점
헐거워진 궁합은 삐꺽이는 소리도 없이
아주 낡은 돌집에 저를 닮은 뒷문 하나
더 이상 할 말도 없이
검은 속살을 드러내고
닮아간다는 게 가끔은 두려울 때가 있어
갈수록 모호해지는 너와 나의 경계에서
문턱을 넘지도 못하고
닫힌 채로
서 있다
♧ 농부의 자서전
여백 없이 쓰인 이야기 미처 다 못 읽고
띄엄띄엄 소제목만 훑어가는 가을날
흩어진 낱장들 위로
집중 호우
지났다
침수된 하늘 한쪽 내려 앉은
월동 무밭
대칭으로 마주 보는
생과 사의 경계에서
어느 게 사는 쪽일까
목을 치켜세우면
해묵은 씨앗들은
이쯤에서 눈을 뜰까
깔끔한 성격대로 잡초 하나 없는
문장
눌러쓴 농부의 생애가
짙어지고 있었다
♧ 살아온 날들 쪽으로 술잔이 기울었다
석양의
실루엣 속으로 물새가 날아왔다
삼십 년 된 친구와 밤새 나누는
수다처럼
자잘한
물결이 깔린 삼양동 방파제
턱을 괸
저녁노을 저 먼저 집으로 가고
날개 접은 등 뒤로 오랜만에
별이 뜬다
스무 살
거기 두고 온 우리들 눈빛 같은,
살아온 날들 쪽으로 술잔이 기울었다
바다와 하늘 사이
수평선 집어등 사이
흐르는
시간의 틈에서 술 한 잔을 나누고
젊음은 어느 별에서
현재형으로 반짝일까
더 깊게
드리워지는 기억의 바닷속으로
잘려진
동영상처럼
별이 내리고 있었다.
* 김연미 시조집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천년의 시작, 2020)에서
* 사진 : 으름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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