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김연미 '골목의 봄' 외 6편과 으름 꽃

김창집 2021. 3. 30. 12:24

골목의 봄 외 6- 김연미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직선의 도로 날에 잘려 나간 마을안쪽

 

윤색된

기억의 빛깔은

늘 찬란한 봄이었다

 

생애의 비밀문자 주름살로 위장하고

자벌레 걸음으로 시간의 경계를 넘는

할머니 뒷모습에도 나른함이 따르고

 

여기서 거가까지

몇 생을 돌아가야 할까

작아지던 골목이 한점 점이될때

 

터질까

사라져버릴까

꽃망울 만개한 봄

 

올레, 외로움의 시작점

 

살짝살짝 엿보다 마당까지 들어와 버린

결명자 서너 포기

엉거주춤 서 있다

돌담 위 틈을 엿보던 콩 넝쿨도 내려오고

 

초침처럼 오가던 발자국이 멈추고

고장 난 시계처럼

정지된 풍경 속으로

구부정 가을이 홀로 빈 유모차 끌며 가고

 

길은 늘 외로움에 시작점을 찍었지

발자국을 지우며

뿌리 내린 풀잎 사이로

황갈색 바람 한 줄기 시작점을 또 찍어.

 

너울성 파도

 

바람 불지 않아도 파도는 높았다

태풍 예보만으로도 꽃잎을 오므리며

갯바위

갯메꽃들이

파르르르 버티고

 

선심성 입김에도 입장 바꾼 기압골

회전교차로 도는 동안 방향을 또 잃었나

막아선

현수막들이

갈기갈기 찢기고

 

태풍의 눈동자가 정수리를 노릴지 몰라

비껴간 경로에도 불안한 하늘의 뜻

신산리

앞괴 바다가

경계선을 긋고 있다.

 

업사이클링

 

맞짱은 맞짱으로

지천명의 이 봄날

 

징검돌 두어 개 놓고 문득 길이 끊겼나요

바람이 흔드는 대로 손을 놓아도 좋아요

 

긴 머리 시니어 모델 당당하던 워킹처럼

 

떨어질 땐 고딕 풍으로

타협 없이 가세요

 

두 번째

꽃을 피우는

낙화들의 업사이클링

 

닫혀 있다

 

폭풍우 심한 밤을 겨우 지난 다음 날 아침

해가 뜨는 방향으로 사람들은 떠났다

어디쯤 놓쳤던 걸까

따라나설 수 있던 지점

 

헐거워진 궁합은 삐꺽이는 소리도 없이

아주 낡은 돌집에 저를 닮은 뒷문 하나

더 이상 할 말도 없이

검은 속살을 드러내고

 

닮아간다는 게 가끔은 두려울 때가 있어

갈수록 모호해지는 너와 나의 경계에서

문턱을 넘지도 못하고

닫힌 채로

서 있다

 

농부의 자서전

 

여백 없이 쓰인 이야기 미처 다 못 읽고

띄엄띄엄 소제목만 훑어가는 가을날

흩어진 낱장들 위로

집중 호우

지났다

 

침수된 하늘 한쪽 내려 앉은

월동 무밭

대칭으로 마주 보는

생과 사의 경계에서

 

어느 게 사는 쪽일까

목을 치켜세우면

 

해묵은 씨앗들은

이쯤에서 눈을 뜰까

깔끔한 성격대로 잡초 하나 없는

문장

 

눌러쓴 농부의 생애가

짙어지고 있었다

 

살아온 날들 쪽으로 술잔이 기울었다

 

석양의

실루엣 속으로 물새가 날아왔다

삼십 년 된 친구와 밤새 나누는

수다처럼

자잘한

물결이 깔린 삼양동 방파제

 

턱을 괸

저녁노을 저 먼저 집으로 가고

날개 접은 등 뒤로 오랜만에

별이 뜬다

스무 살

거기 두고 온 우리들 눈빛 같은,

 

살아온 날들 쪽으로 술잔이 기울었다

 

바다와 하늘 사이

수평선 집어등 사이

흐르는

시간의 틈에서 술 한 잔을 나누고

 

젊음은 어느 별에서

현재형으로 반짝일까

더 깊게

드리워지는 기억의 바닷속으로

 

잘려진

동영상처럼

별이 내리고 있었다.

 

 

                        * 김연미 시조집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천년의 시작, 2020)에서

                                                            * 사진 : 으름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