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윤병주 시 '고라니는 어디로 갔을까' 외 2편

김창집 2021. 4. 7. 09:39

고라니는 어디로 갔을까 - 윤병주

 

봄날 흐린 산맥 위에 걸린 눈발이 오기 전

양지쪽 산나물을 뜯어먹던 고라니가

눈길 옆 덫에 걸려 숲에 원을 그리다 죽었다

고라니 몸이 죽음을 껴안는 순간부터

산에 걸린 저녁 눈발이 죽음을 밤새워 덮고 갔다

 

바람의 집을 찾는 잠자던 씨앗들이

고라니 죽음 몸을 덮으며 몰려들었다

마치 수의라도 입혀주듯이

어떤 울음소리를 완강히 파먹고

봄이 되자 기름진 꽃들이 피어났다

 

봄날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양지쪽 바람은 살찌고

단단한 숲의 경계를 만들고

살신의 보시행 쪽 심장을 꿰뚫고

비장하지 않게 봄바람들이 서로 마주 서서

생명들을 폭죽처럼 터트렸다

 

핀 꽃들은 고라니 새끼들의 허기진 저녁이 되고

숲은 더 이상 죽은 고라니를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봄날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식욕으로

고라니 무덤가에서 산나물을 뜯어

춘곤증을 깨우며 봄 한철 산그림자를 건너갔다

 

대관령의 봄 - 윤병주

 

대관령 아래 방금 피어난 구름이 봄의 둥지를

휘감으며 낮은 마을 행방을 살핀다

 

겨우내 메말랐던 저작나무 목피가 반지르르

물기가 스며들고

사막 같던 산골마을 안부들이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한다

새들의 잊혔던 오솔길이 오류보다 부드럽게 깨어나고

지난겨울 산맥을 바람의 무게를 가늠해 보던

누군가의 발길이 푸른 상처로 되살아난다

물길의 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나무 안의 수액들 어둠의 내부가 봉창 깨지듯 울리고

산 아래 금기에 빠진 빗장들이

젖은 안부 속으로 조금씩 풀려 나온다

 

낮은 회상을 넘어 봄의 입구를 기웃거리던

큼큼한 겨울의 아랫도리가

구름을 동동 구르며 한낮의 첩자들처럼 문틈을 뚫는

, 그러나 아직은 금단의 기운을 몸에 돌리고

욕망을 꿔서는 안 될

비 내리는 고갯마루 집 한 켠

자작나무 둥치 속 메말랐던 계절이

다시금 푸른 이동을 피워 올린다

 

허균과 방풍죽 - 윤병주

 

해풍이 바람을 움켜쥐고서

바닷가 찬 바람소리에 귀먹은 식물들이 끓어오른다

 

청명이나 곡우의 소금기 먹은 방풍잎이 허름한 집들에

생기를 품고 입을 크게 벌린 햇살을 불러들인다

기온 차가 심한 날씨가 잔잔해지면 먼 곳으로 떠나간 사람들을 기다리며

바닷가 사람들의 식욕을 깨우며 식물들도

한 공간을 장지를 지킨 듯이 피워 올린다

 

바닷가 거친 물살을 밀고와 자란 생이란 무엇이겠는가,

끈질긴 씨앗을 잡고 유전된 맛의 순결한 안쪽까지

몸을 눕혀 다른 체위로 바다에서 이름을 얻는 것인 줄

육탈한 식물들은 알고

알몸의 빗장뼈를 열고 피었을까

 

봄 내음 한 철 피어오르던 바람벽에서

어떤 조선의 유배 온 선비

푸른 식욕을 적었던 문장도

몸속에서 관계한 그런 일과 무슨 사연을 추락하는 속도에

땀을 흘리며 적었다가 지우면

몇 백 년 구름 속에 잠을 자던 문장을 깨워

허균은 그날을 기억하며 방풍죽이 끓고 있는

초당의 바닷가 마을로 올 수 있을까

공중에 걸린 몇 번의 생이

유전된 맛을 툭툭 피워낼 수가 있을까

 

그 억센 이승의 힘겨운 날을 잡고 피는

식물들의 힘

까마득히 멀리 온 바닷가 바람과 유배된 집과

교환하는 높은 산, 눈 녹은 물이 바다로 흘러들고

눈 먼 숭어들이 바다의 풍습을 메고

떠나간 사람들처럼 돌아오면

오래도록 유전해온 희고 끈끈한 해안가 방풍들

허균의 무력한, 꽃을 보던 날이

헌 묘처럼 돌아와 피고 지던 봄날이 오고 간다

 

                                *유병주 시집 풋사과를 먹는 저녁(현대시학, 2020)에서

                                                         *사진 : 고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