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광렬 시 '꽃잎 마음' 외 5편

김창집 2021. 4. 11. 01:25

꽃잎 마음

 

짓쳐 가는 바람의 손끝에서 간당거리다

 

사르르 지고 마는 꽃잎

 

저 꽃잎 떨어져 내리는 동안만이라도

 

저 바람 마음 한없이 쓰라렸으면 좋겠네

 

미안해하는 눈빛 하나 없이

 

망설이는 눈빛 한 번 없이

 

뒤도 안 돌아보고 모른 척 훌쩍 가버리면

 

저 꽃잎 살아도 아주 살지 못하리

 

저 꽃잎 죽어도 아주 죽지 못하리

 

내가 무섭다 김광렬

 

밥을 먹으면서 여전히 허기진 것은

진짜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마음의 배가 고파서라는 것을 안다

 

불빛 속에서 불빛이 그리운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등불이 아니라

나만의 등불을 켜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알면서도 나만의 밥그릇을 챙긴다

알면서도 나만의 불을 켠다

그 밥 따뜻하지 않고 그 불빛 어둡다

 

알면서 그런 삶을 살아왔다

알면서 그런 삶을 살고 있다

알면서 그런 내가 무섭다

 

맑은 길

 

어느 날 숲길을 걷다가

두 눈 딱 마주친 노루의 착한 눈망울에서

저 사악한 눈빛이

내 모습이면 어쩌지하고

걱정하는 속마음이 비친다

나를 공격하면 나도 맞서겠다며

벼르던 주먹이 부끄러워진다

우연히 마주쳤을 뿐 우리는 적이 아니다

눈과 눈을 읽으면

서로에게 닿는 맑은 길이 보인다

 

파격(破格)

 

물속에 나무 서있고

그 사이로 초승달 다소곳이 내려앉았다

 

바람이 발뒤꿈치 들고

사분사분 걸어갈 때 물살이 사르르 흔들렸다

 

나무도 초승달도 살짝 이마를 찡그렸다

내 눈살도 찌푸려졌다

허나, 미워하지 마라

 

때로는 파격이

살짝 삐쳐나간 눈썹처럼 고울 때 있으니

 

바늘귀

 

저 먼 곳에서

수직으로 달려오는 수많은 빛들이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이 바늘귀를

모두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흰빛들이

한꺼번에 작은 구멍을 지나는 일은

내가 저 별을

거머쥐는 일만큼 어렵다

 

어떤 빛들은 지금

바늘귀를 꿰고 있는 빛에게

얼른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자신의 바늘귀를 찾아나서지만

 

네가 가는 길을

내가 못 갈 이유가 뭐냐고

 

억지 부리는 사람아

 

사실은, 빛 하나하나 흐르는 곳이

한 땀 한 땀 다 바늘귀인 것을

 

바닷가 카페에서

 

흰 기둥과 붉은 벽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그 바닷가 카페는

바닷가 쪽으로 까만 문이 열려 있다

 

안으로 들어서다 흠칫 놀라 뒤돌아서는데

눈 아래 펼쳐진 푸른 바다가

내 고단한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 그 어디쯤 자리하면

흰 기둥과 붉은 벽쯤은

잠시 외면하거나 잊을 수 있을까

 

파란 파도 소리가 창유리에 와 부딪히며

사금파리처럼 조각조각 부서져 내린다

 

사는 일이 고달파도 좋다

흰 기둥과 붉은 벽 집에 있다 해도

파란 바다를 노래하면 되는 것이다

 

허공을 자유롭게 나는 바다 갈매기 한두 마리쯤

살짝 눈썹 위에 얹어 놓으면

마음은 금방 수평선처럼 안온해진다

 

현실은 나날이 분단 이야기와 불안으로 지쳐가도

파란 꿈은 파르라니

그 모든 불협화음을 맑게 씻어낸다

 

                            *김광렬 시집 존재의 집(시작시인선 0358, 2020)에서

                            *사진 : 봄꽃 차례로 동백, 멀꿀, 장딸기, 양지꽃, 남산제비꽃, 깽깽이풀, 모데미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