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홍성운의 시조와 등나무 꽃

김창집 2021. 5. 2. 00:31

제 딴엔

    -갈등 사이

 

칡은 오른쪽으로

등나무는 왼쪽으로

 

오른돌이

왼돌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양돌이

더덕 넝쿨이

세상을 다 쥔 듯이

 

아버지의 중절모

 

장미꽃 한창 필 쯤 아내가 내민 선물

내리꽂는 햇살에 주눅 들지 말라며

한지 향 올올이 배인 모자를 씌워줍니다

 

그에 언뜻 떠오르는 안데스 산맥 사람들

남녀 모두 나들이엔 중절모를 쓴다는데

햇빛을 가리기보단 그들의 복식이겠죠

 

몇 살이면 중절모가 어색하지 않을까요

가만히 손을 얹어 거울 앞에 서봅니다

빙그레, 소싯적 아버지, 저를 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등불

 

내가 할 수 있다면 5촉광을 발하여

구순 어머니가 온종일 머무는 방

눈높이 벽면을 세네

전구로 앉고 싶다

 

어머니는 나날이 거동을 줄이시고

말문을 닫았는지 방에 누워 계셔

이따금 꿈속에 들어

갈걷이를 하시나보다

 

낮이나 밤이나 수면등을 켜두신다

밝음과 어둠 사이 경계를 지우고

이승의 낮은 불빛을

붙잡고 싶음이다

 

내 몸과 마음의 집, 어머니 어머니

귀뚜라미 소리에도 깍지가 여무는 밤

내 맘은 알전구 불빛

텃밭을 훑고 있다

 

양은 도시락

 

돌아가라면 돌아갈까

보리누름 한시절로

 

등하교 십리 길을

걸음 반 뜀 반하며

 

종아리 알이 박히던

비포장 나의 유년

 

풋보리 익어가는 5월 한나절

 

먹어도 배고팠다

양은 도시락 꽁보리밥

 

지금도

맴돌고 있네

빈 도시락 그 소리

 

내 맘속의 멀구슬나무

 

동네 어귀를 돌아 아름드리 멀구슬나무

대소사가 있거나 돼지를 추렴 할 때

기꺼이 굵은 가지를 내주곤 하였다

 

부르지 않아도 아이들은 모여든다

툭 던진 오줌보 하나, 한나절이 지나가고

설익은 고기 한 점에 나 또한 행복했다

 

빡빡 깎은 머리에 괜히 앙탈 부릴 때

그런 날 멀구슬나무는 보랏빛으로 다가와

온종일 함께하여도 향기 가시지 않았다

 

둥치의 주름이야 한 낱 세월이겠지

유배 온 조선 임금, 면류관 주렴 같은

겨우내 섬 하늬 앞에 멀구슬을 달고 있다

 

오죽(烏竹)의 시선

 

이태 전 사립문 옆 오죽 몇 개 심었다

눈길 한번 없어도 죽순은 돋아나고

섬겨울 하늬바람에

댓잎소리 제법이다

 

녹색의 점무늬로, 점무늬가 갈색으로

한겨울 눈보라를 네댓 해 맞고서야

푸른 빛 은은히 배인

오죽으로 거듭난다

 

카스트는 아니다 서열은 애초에 없다

속마음 비워내고 꼿꼿이 섰을 때

비로소 오죽이 된다

사람도 그렇다

 

편백나무 베개

 

언젠가 불면으로 수면베개 갖고 싶었다

봉평장 메밀 베개나 비자씨앗 베개 말고

한 생애 구새 먹었을

그런 나무

그런 베개

 

여름도 주말 한때, 매미 소리 실한 날

간밤에 뒤척인 잠 한소끔 풀까하여

온 생각 내려놓으며

툇마루에 누웠는데

 

코끝을 간질이는 이 향기는 무엇일까

설핏 잠이 들어 숲 속에 내가 있다

오래전 뉘와 걸었던

그 길을 걷고 있네

 

꿈속에 환하던 숲, 눈을 떠 보고 싶어

편백나무 베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생가슴 에였을 옹이

오히려 향이 짙네

 

 

                                              *홍성운 시조집 버릴까(푸른사상, 20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