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땀과 단 꿀
꽃필 때마다 꽃줄기 마디마디에서 이슬방울 내뱉는
우리 집 몇 포기 서양난들
별로 돌보지도 못하는 데도
가끔씩 그 귀한 꽃들을 어렵게 간신히 피워내는데
메마른 그 척박한 좁은 화분 속에서 나름대로
살아가기 얼마나 힘들까, 꽃필 때마다 그 이슬방울
너무 힘들어 진땀 흘린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나
나만의 그 연민 너무 당연해 한 번도 의심해 본적 없지만
요즈음 꽃에 관심 많아 꽃피고 있는 난欄 유심히 살펴보면서
저것이 진짜 짜디짠 땀방울일까 번쩍 의심이 들면서
방울방울 맺힌 이슬 살짝 맛보니
아니, 이게 웬일!
놀랍게도 그건 달디단 꿀방울이었네
왜 나는 그걸 그렇게 오랫동안 추호의 의심도 없이
힘들어 흘리는 진땀이라 생각해 왔을까, 놀랍게도
요즈음 내 모든 생각이 단 꿀처럼 조금씩이나마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하면서
나는 마침내 그렇게도 고통스럽던 나 자신을 얼마간 이겨낸 것 아닐까
나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잠깐 솟아나왔네
그간의 우울했던 기억들의 짜디짠 진땀 같은 눈물 아닌
스스로가 참 고맙고 대견하게 여겨지는
따뜻하고도 달콤한 단 꿀 같은 눈물이
♧ 신神의 한 수數
-은방울 수선화
제주도 친구 집 정원에서 언젠가 이른 봄 알뿌리를 캐다 심은 그 꽃
분당 우리 집 아파트 화분에 심어놨더니 금방 죽어버려
화분째 베란다 한구석에 처박아 둔 채 거의 일 년
그다음 해 추운 겨울 2월 어느 날 어쩌다 보니
그 좁은 화분 속에서 물도 주지 않았는데 어느 틈에
우북이 솟아오른 잎새들 사이, 서너 송이 맺힌 흰 꽃망울까지
새파랗게 윤기 흐르는, 난초잎보다 훨씬 더 낭창낭창한
길쭉하고 통통한 생생한 이파리들
수줍은 듯 고개 살짝 숙인, 여리디여린 작은 꽃에 숨겨진
천둥 치듯, 정신 나게 번쩍 나를 일깨운
그 놀라운 끈질긴 생명력, 기적 같은 생의 의지!
쌀쌀한 초봄 아직 검불뿐인 친구 집 꽃밭 한 귀퉁이에서
새파란 잎 속 줄기에 매달린, 눈꽃처럼
하얗게 반짝반짝 빛났던 그 작은 은방울 수선화라는 꽃
그때 꽃에 무심했던 내 눈길을 이토록 은밀히 유혹한 것은 무엇보다
그 꽃을 이루는 여섯 장의 흰 꽃잎 끝마다 박힌 고 작은 초록색 점들 때문이었다면
(꽃 주인 내 친구는 그 초록색 점들을 신의 한 수라고 불렀다)
다른 꽃들과는 다른 신비스런 고 앙증맞은 작은 초록색 점들은
자신을 멀리 퍼트리기 위한
이 꽃의 충분히 성공적인 전략 아니었던가
이 신기한 꽃으로 인해 꽃을 싫어하기조차 했던 나 같은 한 사람이 이후
그 꽃은 물론 모든 꽃들에 대한 흥미와 관심 조금씩 가지게 되었다면
그리하여 우울함에서 점차 벗어나
일상의 소소한 삶의 기쁨과 행복까지도 조금씩 깨우쳐가게 되었다면
이 또한 이 꽃의 얼마나 굉장한 전략인가
♧ 제주 토종 홑수선화
언젠가 이른 봄 제주 성산일출봉에 갔을 때 술자리에서
그 당시 흔치 않았던 제주 토종 홑수선화 이야기하다가 곧바로 우리들
불현듯 그걸 보러 우도牛島로 향했는데
막상 부두에 나가니 심한 풍랑주의보 일어 페리호가 안 떠서 간신히
그 옆 동네 종달리까지 가서 작은 배 한 척 빌려서 출발했었네
미친 듯 몰아치는 사나운 비바람 속에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 덮쳐 버릴 듯 휘몰아쳤던 제주바다
집채만 한 거친 파도와 비바람
파도 비말飛沫이 소낙비처럼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는
거친 파도 따라 널뛰는 일엽편주 작은 배 안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겁쟁이 육지년(?)인 나
내 생애 흔치 않게 생생했던 죽음의 공포
누운 소도 벌떡 일어나 울부짖는 듯 사나운 폭풍 속의 한 점 우도牛島
검은 구름 떼 휘몰아 내달리는 컴컴한 하늘 아래
날아갈 듯 무너질 듯 서 있기조차 힘들었던 거친 비바람 속에서도
으스러져라 땅바닥을 움켜잡고 새파랗게 질려있는 보랏빛 해국海菊들
한겨울 그 매서운 비바람, 눈보라 뚫고 무리지어 피어난 해변가
미친 바다 비바람에 뿌리째 뽑힐 듯 흔들리던 홑수선화들
꽃 가운데에 노랗게 테두리 진 작은 금잔들이 있고
그 금잔을 받치고 있는 하얀 옥빛 꽃잎들
내 생애 처음 본 감동의 금잔옥대金盞玉臺, 제주 토종 야생 홑수선화들
그 짙고 달콤한 향이니 그 고운 모습이란 그들 말대로
내가 꽃집에서 흔히 본 겹수선화들은 그에 비해
수선화도 그 무엇도 아니었네 그러나 그 중
그날 내가 처음으로 가장 놀랍게 바라본 것은
제주의 그 사나운 날씨와 풍광보다
금잔옥대 그 고운 수선화보다 더욱 놀랍게 바라본 것은
수선화를 보겠다고 그 거센 폭풍우와 파도를 뚫고 우도까지 간
제주 사나이들의 미친 듯한 그 높은 기개, 그 모험심, 그 풍류
아무도 막지 못할 바로
그 무모한 도전정신이었네
* 양정자 시집 『꽃들의 전략』(시작 시인선 0264, 2018)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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