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양정자 시 '진땀과 꿀' 외 2편

김창집 2021. 5. 10. 23:11

진땀과 단 꿀

 

꽃필 때마다 꽃줄기 마디마디에서 이슬방울 내뱉는

우리 집 몇 포기 서양난들

별로 돌보지도 못하는 데도

가끔씩 그 귀한 꽃들을 어렵게 간신히 피워내는데

 

메마른 그 척박한 좁은 화분 속에서 나름대로

살아가기 얼마나 힘들까, 꽃필 때마다 그 이슬방울

너무 힘들어 진땀 흘린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나

나만의 그 연민 너무 당연해 한 번도 의심해 본적 없지만

 

요즈음 꽃에 관심 많아 꽃피고 있는 난유심히 살펴보면서

저것이 진짜 짜디짠 땀방울일까 번쩍 의심이 들면서

방울방울 맺힌 이슬 살짝 맛보니

아니, 이게 웬일!

놀랍게도 그건 달디단 꿀방울이었네

 

왜 나는 그걸 그렇게 오랫동안 추호의 의심도 없이

힘들어 흘리는 진땀이라 생각해 왔을까, 놀랍게도

요즈음 내 모든 생각이 단 꿀처럼 조금씩이나마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하면서

 

나는 마침내 그렇게도 고통스럽던 나 자신을 얼마간 이겨낸 것 아닐까

나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잠깐 솟아나왔네

 

그간의 우울했던 기억들의 짜디짠 진땀 같은 눈물 아닌

스스로가 참 고맙고 대견하게 여겨지는

따뜻하고도 달콤한 단 꿀 같은 눈물이

 

의 한 수

   -은방울 수선화

 

제주도 친구 집 정원에서 언젠가 이른 봄 알뿌리를 캐다 심은 그 꽃

분당 우리 집 아파트 화분에 심어놨더니 금방 죽어버려

화분째 베란다 한구석에 처박아 둔 채 거의 일 년

 

그다음 해 추운 겨울 2월 어느 날 어쩌다 보니

그 좁은 화분 속에서 물도 주지 않았는데 어느 틈에

우북이 솟아오른 잎새들 사이, 서너 송이 맺힌 흰 꽃망울까지

 

새파랗게 윤기 흐르는, 난초잎보다 훨씬 더 낭창낭창한

길쭉하고 통통한 생생한 이파리들

수줍은 듯 고개 살짝 숙인, 여리디여린 작은 꽃에 숨겨진

천둥 치듯, 정신 나게 번쩍 나를 일깨운

그 놀라운 끈질긴 생명력, 기적 같은 생의 의지!

 

쌀쌀한 초봄 아직 검불뿐인 친구 집 꽃밭 한 귀퉁이에서

새파란 잎 속 줄기에 매달린, 눈꽃처럼

하얗게 반짝반짝 빛났던 그 작은 은방울 수선화라는 꽃

 

그때 꽃에 무심했던 내 눈길을 이토록 은밀히 유혹한 것은 무엇보다

그 꽃을 이루는 여섯 장의 흰 꽃잎 끝마다 박힌 고 작은 초록색 점들 때문이었다면

(꽃 주인 내 친구는 그 초록색 점들을 신의 한 수라고 불렀다)

다른 꽃들과는 다른 신비스런 고 앙증맞은 작은 초록색 점들은

자신을 멀리 퍼트리기 위한

이 꽃의 충분히 성공적인 전략 아니었던가

 

이 신기한 꽃으로 인해 꽃을 싫어하기조차 했던 나 같은 한 사람이 이후

그 꽃은 물론 모든 꽃들에 대한 흥미와 관심 조금씩 가지게 되었다면

 

그리하여 우울함에서 점차 벗어나

일상의 소소한 삶의 기쁨과 행복까지도 조금씩 깨우쳐가게 되었다면

이 또한 이 꽃의 얼마나 굉장한 전략인가

 

제주 토종 홑수선화

 

언젠가 이른 봄 제주 성산일출봉에 갔을 때 술자리에서

그 당시 흔치 않았던 제주 토종 홑수선화 이야기하다가 곧바로 우리들

불현듯 그걸 보러 우도牛島로 향했는데

막상 부두에 나가니 심한 풍랑주의보 일어 페리호가 안 떠서 간신히

그 옆 동네 종달리까지 가서 작은 배 한 척 빌려서 출발했었네

 

미친 듯 몰아치는 사나운 비바람 속에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 덮쳐 버릴 듯 휘몰아쳤던 제주바다

집채만 한 거친 파도와 비바람

 

파도 비말飛沫이 소낙비처럼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는

거친 파도 따라 널뛰는 일엽편주 작은 배 안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겁쟁이 육지년(?)인 나

내 생애 흔치 않게 생생했던 죽음의 공포

 

누운 소도 벌떡 일어나 울부짖는 듯 사나운 폭풍 속의 한 점 우도牛島

검은 구름 떼 휘몰아 내달리는 컴컴한 하늘 아래

날아갈 듯 무너질 듯 서 있기조차 힘들었던 거친 비바람 속에서도

으스러져라 땅바닥을 움켜잡고 새파랗게 질려있는 보랏빛 해국海菊

한겨울 그 매서운 비바람, 눈보라 뚫고 무리지어 피어난 해변가

미친 바다 비바람에 뿌리째 뽑힐 듯 흔들리던 홑수선화들

 

꽃 가운데에 노랗게 테두리 진 작은 금잔들이 있고

그 금잔을 받치고 있는 하얀 옥빛 꽃잎들

내 생애 처음 본 감동의 금잔옥대金盞玉臺, 제주 토종 야생 홑수선화들

 

그 짙고 달콤한 향이니 그 고운 모습이란 그들 말대로

내가 꽃집에서 흔히 본 겹수선화들은 그에 비해

수선화도 그 무엇도 아니었네 그러나 그 중

 

그날 내가 처음으로 가장 놀랍게 바라본 것은

제주의 그 사나운 날씨와 풍광보다

금잔옥대 그 고운 수선화보다 더욱 놀랍게 바라본 것은

 

수선화를 보겠다고 그 거센 폭풍우와 파도를 뚫고 우도까지 간

제주 사나이들의 미친 듯한 그 높은 기개, 그 모험심, 그 풍류

아무도 막지 못할 바로

그 무모한 도전정신이었네

 

 

                              * 양정자 시집 꽃들의 전략(시작 시인선 0264, 201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