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강방영 시 '베어진 자리' 외

김창집 2021. 5. 6. 14:49

베어진 자리

 

거대하던 몸이 사라졌어도

그 오랜 시간의 삶이

송두리째 사라졌어도

 

살겠노라는 뿌리의 외침

빼앗긴 과거의 자리에

꽃처럼 새 순들을 피웠으니

 

굳센 마음에서 솟는 희망의 가지들

새로이 다시 시작되는 시간의 역사

 

그 모든 날들 뒤에

 

그 모든 날들이 저물고

그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갔어도

바다

그 자리에서 철썩이고

 

그 모든 꽃들이 시들고

그 모든 흰 눈이 다 녹아도

푸른 산

멀리 그 자리에 서 있다

 

태어난 모든 기쁨과 슬픔들이

숲에서 서걱거리다가 흩어졌어도

저 바다와 산이 마주 보는 어느 곳에서는

영원처럼 파도로 치고 있으리라

 

영일만 해안 호미곶 가는 길

 

포기하라고

언제면 그만 둘 작정이냐고 묻는 듯

 

나무와 풀의 허리를 짓밟으며

바닷가 비탈에서 다그치는 바람

 

풀도 나무도 휘어져 일어서지 못하지만

저마다 뿌리에 힘을 주며

 

절대 그만 둘 수 없다는 듯이

반쯤 누워서도 악착같이 버티는,

 

바로 옆에서 바다 물속의 늙은 바위들도

굽은 등에 죄도 없이 파도의 모진 매 맞는,

 

영일만 해안 따라 호랑이 꼬리

호미곶 가는 길

 

불 밝힌 작은 양초

 

불 밝힌 작은 양초

붉은 종이배로 떠받혀서

밤바다로 띄워 보내는

먼 나라 섬의 사람들

 

그들의 소원은

가물거리며 바다로 나가고,

어둠의 한복판에서

지켜보시는 이는

 

어떤 위대한 존재,

바다와 어둠을 먹물 찍듯 찍어

인간의 운명을 손가락으로

점찍듯 그리는 그런 분인가

 

바다는 드넓고

어둠은 천지를 안고

불 밝히고 배 띄운 사람들은

다시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센 바람

 

한낮을 강타하는 바람

모든 나뭇잎들 꽃들 잡아 흔드네,

 

한밤중에 엄습하는 의구심이

삶의 뿌리를 잡고 뒤흔들 듯이

 

돌아오는 길

 

당신 영결식 후 저녁

돌아오는 하늘 길

산도 구름도 모두 당신 표정

 

이별하고 오는

영원히 작별하고 오는

이 저녁

 

고기잡이배들은 모두

어두워지는 바다에서

노랗게 큰 별들이 되고

 

당신으로 가득한데도

당신 없는 이 세상

별인 양 비행기는 어둠 속을 날고

 

함께 나누는 빛

 

다가오는 가을이

뼈에 스며

전화하고 싶었다는 벗

 

그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솟는 그리움은 같았나,

 

지나간 날들이

기차가 되어 푸른 숲을

느릿느릿 지나가고

 

해바라기 한 송이

높이 고개 들고 뒤늦게 핀다,

벗이 사는 집 울타리 밖으로

 

 

                    * 강방영 시집 그 아침 숲에 지나갔던 그 무엇(시문학시인선 576, 2018)에서

                                                      * 사진 : 실거리나무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