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어진 자리
거대하던 몸이 사라졌어도
그 오랜 시간의 삶이
송두리째 사라졌어도
살겠노라는 뿌리의 외침
빼앗긴 과거의 자리에
꽃처럼 새 순들을 피웠으니
굳센 마음에서 솟는 희망의 가지들
새로이 다시 시작되는 시간의 역사
♧ 그 모든 날들 뒤에
그 모든 날들이 저물고
그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갔어도
바다
그 자리에서 철썩이고
그 모든 꽃들이 시들고
그 모든 흰 눈이 다 녹아도
푸른 산
멀리 그 자리에 서 있다
태어난 모든 기쁨과 슬픔들이
숲에서 서걱거리다가 흩어졌어도
저 바다와 산이 마주 보는 어느 곳에서는
영원처럼 파도로 치고 있으리라
♧ 영일만 해안 호미곶 가는 길
포기하라고
언제면 그만 둘 작정이냐고 묻는 듯
나무와 풀의 허리를 짓밟으며
바닷가 비탈에서 다그치는 바람
풀도 나무도 휘어져 일어서지 못하지만
저마다 뿌리에 힘을 주며
절대 그만 둘 수 없다는 듯이
반쯤 누워서도 악착같이 버티는,
바로 옆에서 바다 물속의 늙은 바위들도
굽은 등에 죄도 없이 파도의 모진 매 맞는,
영일만 해안 따라 호랑이 꼬리
호미곶 가는 길
♧ 불 밝힌 작은 양초
불 밝힌 작은 양초
붉은 종이배로 떠받혀서
밤바다로 띄워 보내는
먼 나라 섬의 사람들
그들의 소원은
가물거리며 바다로 나가고,
어둠의 한복판에서
지켜보시는 이는
어떤 위대한 존재,
바다와 어둠을 먹물 찍듯 찍어
인간의 운명을 손가락으로
점찍듯 그리는 그런 분인가
바다는 드넓고
어둠은 천지를 안고
불 밝히고 배 띄운 사람들은
다시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 센 바람
한낮을 강타하는 바람
모든 나뭇잎들 꽃들 잡아 흔드네,
한밤중에 엄습하는 의구심이
삶의 뿌리를 잡고 뒤흔들 듯이
♧ 돌아오는 길
당신 영결식 후 저녁
돌아오는 하늘 길
산도 구름도 모두 당신 표정
이별하고 오는
영원히 작별하고 오는
이 저녁
고기잡이배들은 모두
어두워지는 바다에서
노랗게 큰 별들이 되고
당신으로 가득한데도
당신 없는 이 세상
별인 양 비행기는 어둠 속을 날고
♧ 함께 나누는 빛
다가오는 가을이
뼈에 스며
전화하고 싶었다는 벗
그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솟는 그리움은 같았나,
지나간 날들이
기차가 되어 푸른 숲을
느릿느릿 지나가고
해바라기 한 송이
높이 고개 들고 뒤늦게 핀다,
벗이 사는 집 울타리 밖으로
* 강방영 시집 『그 아침 숲에 지나갔던 그 무엇』(시문학시인선 576, 2018)에서
* 사진 : 실거리나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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