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우리詩' 2021년 5월호의 시(3)

김창집 2021. 5. 9. 12:53

 

독거노인이 사는 집 - 이명윤

 

  그날 복지사가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 노인이 느닷없는 울음을 터뜨렸을 때 조용히 툇마루 구석에 엎드려 있던 고양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단출한 밥상 위에 내려놓은 놋숟가락의 눈빛이 일순 그렁해지는 것을 보았다. 당황한 복지사가 아유 할머니 왜 그러세요, 하며 자세를 고쳐 앉고 뒤늦게 수습에 나섰지만 흐느낌은 오뉴월 빗소리처럼 그치지 않았고 휑하던 집이 어느 순간 갑자기 어깨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뭔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과 벽시계와 웃옷 한 벌과 난간에 기대어있던 호미와 마당가 비스듬히 앉은 장독과 동백나무와 파란 양철 대문의 시선이 일제히 노인을 향해 모여들어 펑펑,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봄나들이 이수미

 

겨울 가고 봄이 왔으니 두꺼운 옷일랑 홀라당 벗고

바다 같은 사내 가슴팍에 한 사나흘쯤 푹 파묻혀

붉은 갈증 흠씬 쏟아내며 홍매화 꽃 피웠으면 좋겠네

 

광양이나 구례 어디쯤에서

달뜬 몸 풀었으면 좋겠네

 

아무도 모르게 물컹물컹

 

 

목발 신단향

 

네 발 중 한 다리는 칼 맞은 반푼수다

세 발의 뒤뚱거림이 초점 없는 실눈이 되고

먼 별빛이 뢴트켄처럼 머리 위에서 어른거리는데

가뿐 숨결이 파랑 신호등처럼 하악!

하악! 멈춰 서서

저기 만큼도 아득히 바라보다가

양어깨 힘 꽉 주고 다시 내미는 외발

어두운 문 따고 들어가다 주척, 평형의 바람이 기울고

오늘 하루 채워질 양식을 얻으려는

불 켜는 손이 파르스름하다

 

 

물의 칼 - 임보

 

대장간의 화덕에서 벼려진 굳은 쇠붙이만이

예리한 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로 가슴을 베인 적이 없는가?

 

해협을 향해 몰아치는

거대한 파도의 모서리가 아니라

 

몇 방울의 물

 

두 안구를 적시며 흐르는

눈물방울도

 

사람의 가슴을 베는 칼이 된다.

 

 

전어 - 윤순호

 

어장에서도

아마 회오리처럼 뭉쳤을 것이다

그들이 사는 방식은 무리를 짓는 것,

날 때부터 떠돌이였던

그들이 의지할 곳이란 또래 이웃이었다

뭉쳐야 산다는 걸 체험에게 배웠으므로

먹이 품을 팔 때도 떼를 이루었겠지

고소한 맛을 한 뼘이나 키우기까지

얼마나 잦은 울력을 부쳤을까

위기가 닥칠 때마다

뱃속에 돔배젓을 곰삭게 한 건 공포였다

다투어,

기름 저장고를 채우느라

풍랑 속 요동도 아랑곳없었을 터

때가 되어

을 타고 뭍으로 올라온 무리들

가을을 구우려고

무더기 무더기 어물전을 점령하고 있다

 

 

그녀의 밥 - 손수진

 

요양병원 침대 위에

그녀는 오늘도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를 지릅니다

밥 안쳤냐!

그녀의 화두는 언제나 똑같습니다

의사이건 간호사이건 요양보호사이건

아들이건 딸이건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밥을 안쳤는지의 여부가 궁금할 뿐입니다

어떤 기억이 저리도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아

사람들을 이토록 다그치게 하는 걸까요

그녀의 말과 표정은 무서우리만치 집요합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가

밥을 지어 먹여야 하는 누군가가 있는 걸까요

아니면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여 보내지 못한 사람

못내 사무쳐

저리도 아픈 상처로 남아 있는 걸까요

 

 

청천의 유방 - 이장희

 

어머니 어머니라고

어린 마음으로 가만히 부르고 싶은

푸른 하늘에

따스한 봄이 흐르고

또 흰 볕을 놓으며

불룩한 유방이 달려 있어

이슬 맺힌 포도송이보다 더 아름다워라

탐스러운 유방을 볼지어다

아아 유방으로서 달콤한 젖이 방울지려 하누나

이때야말로 애구哀求의 정이 눈물겨웁고

주린 식욕이 입을 벌리도다

이 무심한 식욕

이 복스러운 유방……

쓸쓸한 심령이여 쏜살같이 날라지어다

푸른 하늘에 날라지어다

 

 

                                       * 월간 우리20215월호(통권 395)에서

                                                     * 사진 : 이팝나무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