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목책방 - 김연미
당신은 잠에서 깬 아이처럼 작아져요
밑줄 친 어느 날이 골목을 돌아가면
맨 끝에 진열된 여름
아삭아삭 읽어요
부재중인 사랑보다 달콤한 게 있을까요
받침 없는 의자가 반짝이는 간판
내가 쓴 눈물에 앉아
당신을 기다리죠
바람의 활자들이 편지처럼 자라는 책방
초록빛 그늘 자락 꽂혀진 정오쯤에
오래 전 당신이 썼던 나를 두고
갈까 봐요
♧ 백년의 유품 - 김일연
피멍 든 손가락으로 고통을 다스리셨다
서대문 형무소의 고문실 복도에 핀
유관순 화병받침은 한 송이 들꽃이었다
자유의 나라에서 푸르게 살아가거라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어 슬픈*
한국의 하늘을 닦아 받쳐 들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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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의 유언.
♧ 달 - 두마리아
일 년 내내 오픈런 개런티는 받았니
명목은 주연배우 배역은 들쭉날쭉
조연이 더 빛나는 밤 서글프진 않았니
일 년에 전 석 매진은 대보름 한가위
뽀얗게 분 바르고 환히 등장하겠구나
커튼콜 열광 뒤 허기, 위안은 깡소주다
♧ 돌을 읽다 - 민병도
저문 날 강에 나가 징검돌을 건너다보면
세상 어떤 문자도 범접 못한 경전이 있어
누군가 물속에 숨어 지줄지줄 읽어 주었다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달이 지고 날이 새고
바람에 흔들리느니 차라리 생살 깎아
시간의 지문에 갇힌 깊은 고요, 환하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알지 않고 말하지 않고
날마다 길을 버리면 스스로 길이 되나
밑줄 친 행간에 감춘 한숨마저 읽었다
♧ 가면무도회 - 우은숙
소나기 지나간 늦여름 오후 4시
툭, 하고 쏟아낸 말실수의 조각들
찰나에 다물었지만 입술 감추진 못했다
용서를 가장한 책들이 꽂힌 책장
안경 너머 굴절된 무의식이 걸어온다
너와 나 포장된 응시 색안경이 짙어진다
바닥에 꿈틀대는 애벌레를 바라보다
태연을 분장하고 내 안을 들여다본다
다시금 벗어둔 가면을 집어들 때가 되었다
* 정드리문학 제9집 『내게도 한 방은 있다』(2021. 다층)에서
* 사진 : 5월말의 오름 들꽃. 차례로 각시붓꽃, 금난초, 백작약, 채진목, 참꽃나무, 산개버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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