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찔레 - 이승은
누가 숨겨 두었다면 숨어서 지냈다면
꽃 아닌 적 없었다는 그 말 이제 알겠다
한 시절
설핏한 둘레
하염없이 피었다는
해마다 유월이면 손사래 치던 당신
소주를 사발에 따라 연거푸 들이켰다
총성에
찢기는 하늘
까무러쳐 지더라는
전쟁 끝에 덩그러니 외눈으로 돌아와서
가파른 여울목에 낳아 기른 다섯 남매
가끔씩
꺼진 눈자위
없는 눈을 찔렀다는
♧ 초록 - 이정환
석 달 열흘 동안 속 깊이 잉태했다가
대지 위로 뿜어 올린 겨울은 잠적해도
초록은 어머니 품을 잊지 않을 것이다
무성히 우거지면서 숲을 이룬 온 누리
내리쬐는 볕살 속으로 숨 쉬는 이파리들
초록은 돌아갈 날짜 잊지 않을 것이다
♧ 별을 보며 - 임영석
침묵을 기둥 삼아 집 한 채 짓고 싶다
아무리 많은 사람 망명을 해 와도
침묵의 기둥 하나면 다 수용하는 그런 집.
살인자도 숨어들고 강간범도 숨어들어
남은 생 침묵으로 벌罰 받으며 살다 보면
꽃처럼 말 한마디를 배워가는 그런 집.
밤하늘 어둠을 보면 침묵의 기둥 같다
수많은 영혼들이 어둠 속에 매달려서
무엇을 고백하는데 왜 내가 울컥할까
♧ 붉은머리오목눈이 - 최영효
외딴집 단칸방에 정붙이들 살고 있네
미혼모 오목눈이가 뻐꾸기를 기르고 사네
소문이 꼬리를 물고
사미니 새끼라 하네
피붙이가 버린 것을 살붙이가 알을 품어
제 새끼 내친 놈을 모성으로 거두고 있네
철새도 텃새가 되어
다둥이와 함께 사네
생면목 부리로 캐는 치사랑 내리사랑을
자연은 어머니라서 생명의 둥지라 하네
사랑엔 모반이 없네
사람의 땅 말고는
♧ 화살나무 - 정희경
가을에 날려 보낸 화살의 무덤이다
붉게 물든 단풍은 소문만 무성하고
더러는 꽃 핀 흔적들 가뭇가뭇 말라 있다
시위를 떠나버린 시간의 무덤이다
방향을 잃어버린 무수한 코르크 날개
완만한 곡선을 그리다 가벼이 주저앉고
떠나버린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가난한 마당 한켠 옅어지는 잔설처럼
오늘도 가 닿지 못한 남은 말이 떨고 있다
*정드리문학 제9집 『내게도 한 방은 있다』 (2021. 다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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