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가지 시선 - 양정자
공연히 마음 울적해
친구 따라 마지못해 오른 관악산 산행 길
돌연 폭풍우 들이닥쳤네
우르르 쾅쾅 천지개벽하듯
하늘은 먹물 풀은 듯 캄캄해지고
사나운 비바람 몰아치는데
숲속 나무들 짐승처럼 울부짖었네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겁쟁이 우울한 비관주의자인 나, 중얼거렸네
저 고뇌에 가득 찬 나무들을 좀 바라보라고
머리를 온통 산발한 채
꺾어질듯 휘어질듯 몸부림치는 가여운 나무들
저렇듯 세차고 모진 삶의 시련 속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리는 뭇 인간군상들 같은
저 캄캄한 슬픔의 모습들을
어두운 나에게 늘 환한 빛이 되어 주던
낙관주의자인 내 친구는 오히려 신명나게 소리쳤네
저 환희에 가득 찬 나무들을 좀 바라보라고
오랜만에 그토록 기다리던 비바람 만나
온몸에 팽팽한 촉수를 내뻗고
환호작약(歡呼雀躍)
즐거움에 넘쳐 미친 듯 춤추고 있는 나무들을
저 번들번들 빛나는 검푸른 잎새들
생의 충만한 기쁨을 바라보라고
♧ 쇠비름
그림 그리는 강요배 씨 제주도 고향에 내려와
옹포에서 잠시 혼자 살기 너무 힘들어
밥도 잘 안 먹고 막걸리로 배 채우고 살아갈 때
사흘 동안 내리 막걸리만 마셨는데도 변便은 반지롱하게 잘 나오더라고
글쟁이 현기영 씨 그곳에 찾아가 둘이 바닷가 암반에 앉아 술 퍼마실 때
앉은 자리 바로 곁 새까만 암반 틈으로 세차게 자라 오른 우와, 새파란 쇠비름 줄기들
그걸 뜯어 그 자리에서 바로 술안주 했는데
바닷바람 맞으며 실하게 자라 오른 쇠비름 짭짜롬한 맛이
안주로는 아주 일품이었다고
이태백 시선詩仙도 부럽지 않을
참 지독한 술꾼들의 참모습이리라
♧ 북한산을 오르며
가을에 취했나, 웬 신명이 부풀어
무거운 신발, 양말 다 벗어던지고
맨발 맨살로 산 오를 때
억눌렸던 발바닥이 놀라 깨어나
보드라운 흙, 단단한 돌멩이, 따가운 모래가
살 속을 아프게 파고들었네
바삭바삭 부서지는 낙엽들의 신음소리
뜨겁고 서늘한 흙냄새가 내장까지 속속들이
생생하고 얼얼하게 올라왔네
잠들었던 오관의 신경 줄이 모두 일어나
한 마리 들짐승처럼
온몸이 예민해지고 민첩해지네
타오르는 숲을 양 어깨에 날개처럼 달고
이 능선에서 저 능선으로 날아다니듯
단지 맨발뿐인데
온몸을 다 벗어버린 듯
낡은 살 허공중에 먼지처럼 다 흩어지고
한줌 달디 단 가을 공기 같은 혼만 남아
우주 삼라만상 속을 바람처럼 떠돌았네
오늘 비로소 처음 느꼈네
맨살의 발바닥이 내 몸의 중심이고
내 몸이 바로 우주의 중심인 것을
* 양정자 시집 『꽃들의 전략』(시작시인선 0264, 2018)에서
* 사진 : 거문오름과 그 주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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