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양정자 시 '두 가지 시선' 외 2편

김창집 2021. 6. 7. 09:04

두 가지 시선 - 양정자

 

공연히 마음 울적해

친구 따라 마지못해 오른 관악산 산행 길

돌연 폭풍우 들이닥쳤네

우르르 쾅쾅 천지개벽하듯

하늘은 먹물 풀은 듯 캄캄해지고

사나운 비바람 몰아치는데

숲속 나무들 짐승처럼 울부짖었네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겁쟁이 우울한 비관주의자인 나, 중얼거렸네

저 고뇌에 가득 찬 나무들을 좀 바라보라고

머리를 온통 산발한 채

꺾어질듯 휘어질듯 몸부림치는 가여운 나무들

저렇듯 세차고 모진 삶의 시련 속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리는 뭇 인간군상들 같은

저 캄캄한 슬픔의 모습들을

 

어두운 나에게 늘 환한 빛이 되어 주던

낙관주의자인 내 친구는 오히려 신명나게 소리쳤네

저 환희에 가득 찬 나무들을 좀 바라보라고

오랜만에 그토록 기다리던 비바람 만나

온몸에 팽팽한 촉수를 내뻗고

환호작약(歡呼雀躍)

즐거움에 넘쳐 미친 듯 춤추고 있는 나무들을

저 번들번들 빛나는 검푸른 잎새들

생의 충만한 기쁨을 바라보라고

 

쇠비름

 

그림 그리는 강요배 씨 제주도 고향에 내려와

옹포에서 잠시 혼자 살기 너무 힘들어

밥도 잘 안 먹고 막걸리로 배 채우고 살아갈 때

사흘 동안 내리 막걸리만 마셨는데도 변便은 반지롱하게 잘 나오더라고

 

글쟁이 현기영 씨 그곳에 찾아가 둘이 바닷가 암반에 앉아 술 퍼마실 때

앉은 자리 바로 곁 새까만 암반 틈으로 세차게 자라 오른 우와, 새파란 쇠비름 줄기들

그걸 뜯어 그 자리에서 바로 술안주 했는데

바닷바람 맞으며 실하게 자라 오른 쇠비름 짭짜롬한 맛이

안주로는 아주 일품이었다고

 

이태백 시선詩仙도 부럽지 않을

참 지독한 술꾼들의 참모습이리라

 

북한산을 오르며

 

가을에 취했나, 웬 신명이 부풀어

무거운 신발, 양말 다 벗어던지고

맨발 맨살로 산 오를 때

 

억눌렸던 발바닥이 놀라 깨어나

보드라운 흙, 단단한 돌멩이, 따가운 모래가

살 속을 아프게 파고들었네

 

바삭바삭 부서지는 낙엽들의 신음소리

뜨겁고 서늘한 흙냄새가 내장까지 속속들이

생생하고 얼얼하게 올라왔네

 

잠들었던 오관의 신경 줄이 모두 일어나

한 마리 들짐승처럼

온몸이 예민해지고 민첩해지네

 

타오르는 숲을 양 어깨에 날개처럼 달고

이 능선에서 저 능선으로 날아다니듯

 

단지 맨발뿐인데

온몸을 다 벗어버린 듯

 

낡은 살 허공중에 먼지처럼 다 흩어지고

한줌 달디 단 가을 공기 같은 혼만 남아

우주 삼라만상 속을 바람처럼 떠돌았네

 

오늘 비로소 처음 느꼈네

맨살의 발바닥이 내 몸의 중심이고

내 몸이 바로 우주의 중심인 것을

 

 

                               * 양정자 시집 꽃들의 전략(시작시인선 0264, 2018)에서

                                              * 사진 : 거문오름과 그 주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