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작가' 2021년 상반기호의 작품들

김창집 2021. 7. 24. 10:49

 

우리가 우리를 넘어설 때 - 양안다

 

 밤입니다. 슬픈 악기들이 쏟아지고. 밤입니다. 슬픈 악기들이 슬픈 선율을

 

 쏟아내고.

 

 눈 바깥에서 눈물이 자꾸 죽는다.

 

 들려줄게. 여섯 개의 손가락을 가진 사람에 대해. 여섯 개의 손가락이 연주하는 현악기에 대해. 두 개의 새끼손가락을 거는 약속에 대해. 두 손을 모아도 넘치는 마음에 대해.

 

 나는 조금 웃고 싶어졌어.

 

 꿈의 기억은 꿈속에 두고 온다. 어떤 짐승의 썩은 이빨을 골라 뽑아주고 묻었는지. 누구의 소원이 더 간절했는지. 물고기떼가 하늘을 유영하다가 남긴 구름의 모양 같은 것. 그들이 나의 지문에 남긴 비늘. 그러나 손끝에서 비린내가 난다면.

 

 나는 조금 웃고 싶어졌다. 고장 난 신호등이 너의 머릿속 같았어? 정지선을 넘은 예지몽이 너의 입 밖으로 나오면 나는 그걸 받아 적었지-'1년 뒤, 너는 사라지고 없다.' 우리는 물고기의 습관이 부러워서 두 눈 뜨고 잔다.

 

 나는 조금 웃고 싶어졌는데 내가 조금 웃어도 되는 걸까. 짐승 이빨을 뽑은 만큼 눈물이 떨어지고. 헤엄치는 구름들. 악몽 속 악기들은 비웃음을

 

 쏟아내는데.

 

 목소리가 부풀다 터지는 밤입니다. 나는 나의 입술과 키스하는 꿈을 사랑해. 그러나 너의 입술에 어떤 울음도 묻어 있지 않다면.

 

나를 꾸벅 졸게 하는 건 - 김영

 

풀리지 않는 수학 익힘 책 문제

레 미레 잔잔한 선생님의 목소리 높이

 

아까부터 책상을 무릎삼아 생각하는 로댕이 된 짝꿍

하품 전달자 반 친구들

 

식사 후의 지루한 대화

게임레벨 올리는 법 특강

 

공부 안하고도 백점 맞은 비결

고백을 받았지만 거절했다는 자랑 다

 

단씨투쟁 김현숙

 

얌전하고 가지런하게 참외

둥근 수박 기준삼아

열대야에 헤쳐 모였네.

 

친절한 우리 엄마

매끈하게 발라 주네.

 

꿀이 없잖아요.

씨가 없잖아요.

뭐가 없잖아요.

 

엄마!

혹시 단씨투쟁 중인가요?

 

망치와 송곳 김삼환

 

치려거든 못대가리 정수리를 내리쳐라

부딪치고 깨져도 그것이 길이라면

얼굴을 바꾸지 마라 뚝심으로 가는 거다

 

예고 없이 푹 찌르면 누구나 아파하지

급소만 피하면야 사는 것은 매한가지

그래도 아픈 자리에 꽃이야 피겠느냐?

 

바다 거미 출력소 서정화

 

 영화촬영 세트장 소품 같은 골목길

 소금기 몸을 터는 해풍의 입간판과 규화목 같은 집들 낮은 담장 어깨를 늘어뜨리고 바다는 아직 살아있다고 바람 당도한 거미줄에 눈시울 붉히며 바다거미 한 마리 지나갔어 도르르 말린 필름처럼 추억을 현상하던 길들이 제본된 활판의 빛에 열려 여백 위 소라껍데기 귓가로 대듯 길들 다 젖은 채 파도소리가 채운 하늘을 만들고 있었어 이는 파동 가늠하며 뼈대를 받치고서 떠내려간 바다는 다 걷혀도 기억은 수평선 되어 오래 먼 숲으로 되돌아오는 것일까 물의 흔적이 지나간 뒤에도 바다 냄새가 나는 천체의 행간 밟으며 문법을 고르고 있어

 거미줄 이슬이 맺힌 인쇄거리*가 반짝였어

 

 별을 물고 와도 좋을 극세사 새긴 문장들

 푸른 시계의 나뭇잎들 번역하고 전사하던

 출력소 뜨거운 심장을 놓지 않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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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 교동, 일제강점기 인쇄업 골목.

 

사랑의 유통기한 - 이송희

 

그때였죠.

전부터 조짐이 수상했어요.

 

심심찮은 냄새가 코끝에 감겨오면서

변색된 말의 모서리가

명치에 걸렸어요

 

우리는 겨울을 지나가는 중이였죠

 

살엄음 낀 거울에는 얼어붙은 표정들

 

길 위에 폭설이 내려

발이 쉽게 빠졌어요

 

꺾여진 골목길을 돌아 나온 버스는

자정을 지나자 자취를 감추네요

 

아직도 깨진 액정 속

그와 내가 웃고 있어요

 

물속 - 안규보

 

출렁이는 물 덩어리에 가라앉는다.

아래로 향한 발끝이 나풀거린다.

시퍼런 얼굴에 위로 꼿꼿이 솟은 머리.

 

굳이 불행의 길을 갈 필요는 없잖아.

눈이 따갑진 않지만 그래도 뜨진 않는다.

전화가 온다,

보그르륵 거품이 올라온다.

 

수신을 하기에는 수압이 너무 높다.

열자, 백자 그 아래로, 나를 더 깊이 밀어 넣는다.

 

갈퀴손이 물을 가른다.

비명 소리에 눈을 번쩍 뜬다.

 

너는 살아 있었네.

죽은 줄도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살아 있었네.

뿌드득, 그것이 이를 간다.

시꺼먼 눈구멍에서 눈물이 줄줄 흐른다.

마구잡이로 휘젓는 갈퀴손 사이를

머리카락이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온다.

 

지은아,

물속에 있는 시체는 서지 않아.

서 있다면 그건 무서운 무엇이다.

 

 

                              * 시, 동시, 시조 : 내일을 여는 작가(2021 상반기, 78)에서

                                 * 사진 : 시계꽃(2021. 7. 23. 제주 애월읍 하가리 돌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