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우리를 넘어설 때 - 양안다
밤입니다. 슬픈 악기들이 쏟아지고. 밤입니다. 슬픈 악기들이 슬픈 선율을
쏟아내고.
눈 바깥에서 눈물이 자꾸 죽는다.
들려줄게. 여섯 개의 손가락을 가진 사람에 대해. 여섯 개의 손가락이 연주하는 현악기에 대해. 두 개의 새끼손가락을 거는 약속에 대해. 두 손을 모아도 넘치는 마음에 대해.
나는 조금 웃고 싶어졌어.
꿈의 기억은 꿈속에 두고 온다. 어떤 짐승의 썩은 이빨을 골라 뽑아주고 묻었는지. 누구의 소원이 더 간절했는지. 물고기떼가 하늘을 유영하다가 남긴 구름의 모양 같은 것. 그들이 나의 지문에 남긴 비늘. 그러나 손끝에서 비린내가 난다면.
나는 조금 웃고 싶어졌다. 고장 난 신호등이 너의 머릿속 같았어? 정지선을 넘은 예지몽이 너의 입 밖으로 나오면 나는 그걸 받아 적었지-'1년 뒤, 너는 사라지고 없다.' 우리는 물고기의 습관이 부러워서 두 눈 뜨고 잔다.
나는 조금 웃고 싶어졌는데 내가 조금 웃어도 되는 걸까. 짐승 이빨을 뽑은 만큼 눈물이 떨어지고. 헤엄치는 구름들. 악몽 속 악기들은 비웃음을
쏟아내는데.
목소리가 부풀다 터지는 밤입니다. 나는 나의 입술과 키스하는 꿈을 사랑해. 그러나 너의 입술에 어떤 울음도 묻어 있지 않다면.
♧ 나를 꾸벅 졸게 하는 건 - 김영
풀리지 않는 수학 익힘 책 문제
미〜레 미〜레 잔잔한 선생님의 목소리 높이
아까부터 책상을 무릎삼아 생각하는 로댕이 된 짝꿍
하품 전달자 반 친구들
식사 후의 지루한 대화
게임레벨 올리는 법 특강
공부 안하고도 백점 맞은 비결
고백을 받았지만 거절했다는 자랑 다
♧ 단씨투쟁 – 김현숙
얌전하고 가지런하게 참외
둥근 수박 기준삼아
열대야에 헤쳐 모였네.
친절한 우리 엄마
매끈하게 발라 주네.
꿀이 없잖아요.
씨가 없잖아요.
뭐가 없잖아요.
엄마!
혹시 단씨투쟁 중인가요?
♧ 망치와 송곳 – 김삼환
치려거든 못대가리 정수리를 내리쳐라
부딪치고 깨져도 그것이 길이라면
얼굴을 바꾸지 마라 뚝심으로 가는 거다
예고 없이 푹 찌르면 누구나 아파하지
급소만 피하면야 사는 것은 매한가지
그래도 아픈 자리에 꽃이야 피겠느냐?
♧ 바다 거미 출력소 – 서정화
영화촬영 세트장 소품 같은 골목길
소금기 몸을 터는 해풍의 입간판과 규화목 같은 집들 낮은 담장 어깨를 늘어뜨리고 바다는 아직 살아있다고 바람 당도한 거미줄에 눈시울 붉히며 바다거미 한 마리 지나갔어 도르르 말린 필름처럼 추억을 현상하던 길들이 제본된 활판의 빛에 열려 여백 위 소라껍데기 귓가로 대듯 길들 다 젖은 채 파도소리가 채운 하늘을 만들고 있었어 이는 파동 가늠하며 뼈대를 받치고서 떠내려간 바다는 다 걷혀도 기억은 수평선 되어 오래 먼 숲으로 되돌아오는 것일까 물의 흔적이 지나간 뒤에도 바다 냄새가 나는 천체의 행간 밟으며 문법을 고르고 있어
거미줄 이슬이 맺힌 인쇄거리*가 반짝였어
별을 물고 와도 좋을 극세사 새긴 문장들
푸른 시계의 나뭇잎들 번역하고 전사하던
출력소 뜨거운 심장을 놓지 않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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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 교동, 일제강점기 인쇄업 골목.
♧ 사랑의 유통기한 - 이송희
그때였죠.
전부터 조짐이 수상했어요.
심심찮은 냄새가 코끝에 감겨오면서
변색된 말의 모서리가
명치에 걸렸어요
우리는 겨울을 지나가는 중이였죠
살엄음 낀 거울에는 얼어붙은 표정들
길 위에 폭설이 내려
발이 쉽게 빠졌어요
꺾여진 골목길을 돌아 나온 버스는
자정을 지나자 자취를 감추네요
아직도 깨진 액정 속
그와 내가 웃고 있어요
♧ 물속 - 안규보
출렁이는 물 덩어리에 가라앉는다.
아래로 향한 발끝이 나풀거린다.
시퍼런 얼굴에 위로 꼿꼿이 솟은 머리.
굳이 불행의 길을 갈 필요는 없잖아.
눈이 따갑진 않지만 그래도 뜨진 않는다.
전화가 온다,
보그르륵 거품이 올라온다.
수신을 하기에는 수압이 너무 높다.
열자, 백자 그 아래로, 나를 더 깊이 밀어 넣는다.
갈퀴손이 물을 가른다.
비명 소리에 눈을 번쩍 뜬다.
너는 살아 있었네.
죽은 줄도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살아 있었네.
뿌드득, 그것이 이를 간다.
시꺼먼 눈구멍에서 눈물이 줄줄 흐른다.
마구잡이로 휘젓는 갈퀴손 사이를
머리카락이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온다.
지은아,
물속에 있는 시체는 서지 않아.
서 있다면 그건 무서운 무엇이다.
* 시, 동시, 시조 : 내일을 여는 『작가』(2021 상반기, 78호)에서
* 사진 : 시계꽃(2021. 7. 23. 제주 애월읍 하가리 돌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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