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란이 들판 - 강덕환
개월이, 넙거리 너머 궤펜이오름
한라산을 배경 삼은 이곳 들판에 서면
산란이라 불러야 할 여기는
온통 싸움터였단다
크엉크엉 우룩맞추던 노루도 숨을 죽이고
생솔가지 뚝뚝 분질러지는 소리에
화들짝 산새들도 몸을 움츠리던
그해 겨울
동상 걸려 짓무른 발가락 고름 짜내며
산죽을 헤쳐 소식을 전하던 척후병의
다급한 목소리, 등허리에서 뿜어져 나와
눈밭에 물들이던 시야혈천(屍野血川)
볼레열매 한 줌 움켜 먹어 피똥을 싸고
멩게낭 마른 가지로 불 피워 밤새 언 손 녹이던
남원에서 표선에서 조천에서 구좌에서
여기까지 떠밀려온 피난민들의 한뎃잠도
별똥별로 무너지던 숱한 밤
겨울 지나 다시 그 싸움터
빈숲에 서면 바람소리에 묻어
김의봉 부대의 암호가 올지도 몰라
산철쭉 검버섯으로 엉겨
숱하게 피고 지는 사이
아물지 못하는 계절이 흐르는 사이
♧ ᄆᆞᆯ 죽은 밧 – 강봉수
아방은 밧디 갔다 오당 구멍가게 술밧디 빠졍 ᄌᆞ냑 때가 되어도 오질 안 허고 어멍은 성안 강 미장원에 들렸덴 허는디 파마를 시 번이나 헐 시간이 지나도 오질 안 헴신게 말젯 건 어딜 강 꼬랑지도 보이질 안 허는지 물항이 골착허연 낼 아척 밥은 다 허였져 간디 읏고 온디 읏인 걸 보난 아멩해도 ᄆᆞᆯ 죽은 밧 들어싱고라, 아멩이나 굶지만 안 해시문 좋겨
오당도 버칠 시간 어딜 가신고
한양 큰 님도 해천 뵈리당
질 잃어부러신디
게므로사 ᄂᆞᆷ 일이렌 쉬이 ᄀᆞᆯ아지쿠가
게메이 경해도 ᄒᆞᆫ질 구짝 걸어갈 사름은
해천 뵈령 안뒈주
기여게
해천 뵈리당 푸더진덴 허는 말이
꼭 맞는 말이라
까마귀 궤길 먹은 사름만이
ᄆᆞᆯ 죽은 밧 드는 게 아니란 것을
멩심허여사
아무상 읏이 ᄄᆞᆫ디 정신 ᄑᆞ는 게
해천 뵈리는 일이고
ᄆᆞᆯ 죽은 밧 드는 일인 거주
♧ 봄 – 김경훈
동상(凍傷)이
조바심친다
아직
새 살 먹었는데
겨드랑이에 묻은 씨앗이 문득
근질거린다
아,
봄의 날개!
♧ 위인전(偉人傳) 읽기 - 김병택
요란한 바람이 끊임없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실수로, 말을 잘못 뱉고서도
상대를 바라보는 두 눈은
이전과 다름없이 당당했다
기세를 좀처럼 굽히지 않는
그의 어깨와 다리에서는 늘
검은색 양복의 가느다란
올들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주위를 어지럽게 감도는 소음을
소멸시키는 능력은 탁월했지만
애초부터, 그에겐 헛된 도전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페이지를 넘기는 내 눈에는
초상화 위에 천천히 쌓이는
‘상실’과 ‘공허’의 그림자가
뚜렷이 잘 보였다
♧ 불알시계 - 김수열
시간 몰라 난처할 때는 제삿날이었다
설상(設床)이야 그럭저럭 해 그물어 차리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파제(罷祭)였다
지들커로 화식(火食)하던 시절이라
때가 되면 메 앉히고 갱을 데워야 한다
작은 방에 설상을 하고
상부며 궨당들은 소반 받아 음복(飮福)을 하고
기다림에 지친 어린 것들은 소랑소랑 삼방에 잠이 들고
제상을 지키던 어버지는
잔부름씨하다 꼬닥꼬닥 졸음 겨운 어린 것을 깨우고는
‘밖에 나강 보라, 북두성 꼴랭이가 어디 시니?
마당에 나온 어린 것은 덜 깬 눈으로 북천(北天)을 보다가
‘예, 동펜이 울담 먹구슬낭에 거러졌수다’
아버지는 흐음, 흐음, 헛기침으로 주변을 깨우고는
정지에 대고 낮고 길게 한 마디 하셨다
‘어어이’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났을까
‘아무개 조합장 기증’ 불알시계가 떡 하니 걸려
또각또각 꺼덕꺼덕 하면서부터
어린 것에겐 별 볼 일 대신 다른 볼 일이 생겼는데
새벽 밭 나가기 전, 아버지는 잠결에 대고 한 말씀하셨다
‘시계한테도 밥 주라’
♧ 질경이 – 김순남
늘씬한 기를 세우고
잘나고 예쁜 꽃 피워내는
힘센 풀밭에서는 이파리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영영 죽고 마느니, 차라리
볕 좋은 길에나 가자
오가는 발길마다 온몸이 으스러지게 밟히더라도
나는 다시 일어설
뿌리의 힘을 믿는다.
* 시 : 『제주작가』(제주작가회의, 2021년 여름, 통권 73호)에서
* 사진 : 괴산 화양계곡과 응봉산 덕풍계곡에서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가' 2021년 상반기호의 작품들 (0) | 2021.07.24 |
---|---|
김종호 시 '잃어버린 신발' (0) | 2021.07.23 |
김항신 시 '소확행' 외 5편 (0) | 2021.07.21 |
홍해리 시선집 '마음이 지워지다' 발간 (0) | 2021.07.19 |
내일을 여는 '작가' 2021년 상반기호의 시 (0) | 2021.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