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마존으로 간다
말이 씨가 되기도 하고 詩가 되기도 하지만
말만 하면 외국어로 바꿔주는 어플에
내 시가 걸려든다면 어떻게 번역될까
우리말로도 읽지 않는 시조, 시조가 말이야
거기에 또 허탈한 게 있어 말 안 할까 했는데
심지어 눈 깜빡할 새 해치우고 만다는 거야
몇날 며칠 고치고 고민한 내 작품을 말이야
단번에 덮어쓰기 하며 말 바꾸기 해버릴 텐데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 눈치 없는 어플 때문에
세상사람 웬만하면 다 아는 영어 말고
다른 언어로 해 볼까? 불어? 인도어, 서어? 아랍어?
아니야, 이 언어들도 아는 사람은 알 거야
아, 아마존 원주민들을 만나러 가야겠다
그들의 언어로는 어찌 익히나 궁금하거든
아직은 생각하면서 읽어 줄 인류가 필요해
♧ 도둑의 내성
계속 받기만 하는 건
훔치는 거라 하더라
제 발 저려 담장 넘어 도망치는 시늉 마라
누군들
도둑, 한 번쯤
돼본 적 없었으랴
받는 데 익숙해져
절도죄 된다 해도
실형 선고는 되지 않고 툭 하면 집행유예
제기랄,
내주려고만 하는
역류성 식도염
♧ 탁상달력
일 년짜리
삶을 살아도
너 가히 당당하다
힘겨웠던 서른 날을
다리 벌려 딱 버티며
긴 머리
쓸어 넘기듯
젖혀버리는
저 평정심
♧ 노쇼 no-show
단체 손님 맞을 준비 한창이던 식당 주인
약속시간 삼십 분 전 못 온단 일방 통보
툭 끊은 전화기 너머 울컥하는 저녁놀
예약금도 못 받는 명퇴자 골목 식당
구조조정 회사에서 한때는 살아남고
천하의 아이엠에프도 기어이 견뎠는데
예약 부도 이것이 밟아버린 자존심
테이블 위 수저들이 웅성대며 그를 보네
쇼쇼쇼 사는 게 다 쇼인데 노쇼라니 노쇼라니
♧ 출륙금지령
17세기 초 조선으로 자가격리 반송한다
제주말이 서울말과 이토록 다르게 된
역사도 거리두기 하는 2백 년 강제격리
진상하는 자 말고는 육지 땅을 밟지 마라
팬데믹 코로나다 집 밖에 나오지 마라
때 아닌 2주간 고립에 소환되는 출륙금지
♧ 무인택배함
정 줄 데 없으면 내게 두고 가시라
미움 전할 데 없어도 내게 놓고 가시라
그 사람 부재 시에는 두말 말고 맡기시라
내게 잠깐 왔다가도 슬퍼하지 않으리라
철커덕, 도로 내줘도 아파하지 않으리라
딱하나, 너 아주 없다면 나 많이 힘들리라
*시 : 조한일 시집 『나를 서성이다』(시와 실천, 2021)에서
*사진 : 풍란(소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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