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잃어버린 신발
퇴근하려는데 신발이 없다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는다
월급날이라 모두들 활짝 핀 얼굴들이다
한잔하자며, 낄낄낄 썰물처럼 빠지는데
신발이 없다
땅거미 촉촉이 배어드는데
오늘은 월급날, 아내가 기다릴 텐데
여기저기 쪼개다 보니 손이 허전하다
고졸 출신인 나는, 호봉이 낮은 나는
월급날이 쓸쓸하다
저마다 은행원들처럼 뻣뻣한 지폐를 호기롭게
척, 척, 척, 척 소리를 내며 세고 세지만
안주머니에 봉투를 슬쩍 밀어 넣고
나는 모른 척 쓸쓸하다
신발이 없다
참새들은 저무는 나무에서 시끄럽고
빈 교무실에 덩그러니 시리다
늘 그랬지, 늘 혼자였지
‘짠!’ 하고 잔을 부딪치며 잔을 돌릴 때에도
생각해보니 나는 혼자였어
‘까짓것 내일이라도 고만두고 말지’ 하면서
버텨온 직장, 날마다 닳아진 얼굴들인데
담배 한 개비 스스럼없이 얻어 피우면서
익히 아는 듯 모두 낯선 얼굴들이다
벽에 걸린 어느 외딴 도시 쓸쓸한 거리
나는 그 서먹한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일까
신발이 없다
현관 앞에 두 아름이나 되는 백 년 소나무
시꺼먼 사천왕상의 웅-웅-거리는 계시를 들으면서
나는 자꾸 음산하고 께름칙하다
귀신이 곡할 일이다
낡았어도 발이 편해서 삼 년이나 끌고 다니는 고물딱지를
누가 탐내거나 훔쳐갈 리도 없고
누가 잘못 신고 갔다면 대충(代充)은 있을 것 아닌가
이거야말로 귀신의 짓이다
원래 이 터가 일제 신사 터인데다 비 오는 밤이면
소복을 한 여인이 통곡을 한다는 도체비엉장* 아닌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고 뒷목이 서늘하다
뭐야. 달나라 가는 시대에……
아니지, 내가 실존이면 귀신도 실존이지
낮과 밤이 있고, 빛과 어둠이 있지 않은가
빛이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다면
사탄은 어둠의 주관자 아닌가
사탄은 디테일하다는데
신발을 잃어버리면 가슴 아픈 일이 생긴다는데
내가 오늘 집에 돌아갈 수는 있을까
정신 차려! 네 오랜 믿음이 겨우 공작새의 깃털인 거야
아니지, 문제는 늘 잘난 체하는 데 있지
사탄은 인간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꿰고 있지
저 장담하던 베드로도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했지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인일까?
하긴 뜬금없이 통풍이 온 것만 해도 그래
아무리 하나님이 그런 사소한 사인을 하실까?
사소하다? 그것이 문제인 거지
하나님의 섭리엔 살인자라도 목을 뎅강 치는 법은 없지
그때마다 댕강댕강 목을 쳤다면 세상이 남아났겠어
그제도 어제도 같은 날 아무 일도 없듯이
하나님의 전조는 모르게 오지, 아닌 듯 기다리시지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고 노아의 홍수 때도 그랬지
그때도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무시하였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으라”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쿨쿨 잠만 자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 내가 너무 막걸리 통에 빠져 있었던 거야
자만에 빠져서 말씀보다 내 생각과 의지를 고집하였어
그렇더라도 네 믿음이 자그마치 칠십 년 아닌가
믿음은 순종이지, 셈이 아니지
개구리의 가마솥에서 잠에 빠져 있는 거야
신발이 없다
저물녘 어둠은 짙게 발묵하는데
빨리 집으로 가야만 하는데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일 년 사철 몸뻬를 입고 사는 마누라
쓴 데를 쓸고, 닦은 데를 닦으면서
여기저기 꿔다 쓴 돈을 헤아리며 있겠지
그렇더라도 가다가 식당에 들려 외상값도 갚고 공짜로
완 병 완 사라도 즐기고, 흥얼대며 약간은 으스대며 들어가야지
‘One 병(甁), One 사라(さら)’라, 허! 4개국 말이 아닌가, 그럴듯해
이러거나 저러거나 나는 나로서 최고인 거야
하나님이 나 외엔 나를 만들지 않으셨지
신발이 없다
밤은 깊음 속으로 빠져들고
이제는 집으로 가야 할 때
모처럼 아이들의 과자도 한 봉지 사 들고
돼지고기도 둬 근 사 들고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야지
난생처음 과자 봉지를 들고 왔으니 아이들은 방방 뛰겠지
마누라는 어떤 표정일까 아이들처럼 좋아할까
안 하던 짓 하면 빨리 죽는다는데, 라며 걱정할까
“꼬리에 빚을 줄줄 달고 살면서 이게 뭐하는 짓이야!”
냅다 물 한 바가지라도 끼얹을까, 그건 아니지
절대 소크라테스의 처는 될 수 없는 위인이지
‘고기 두 근이면 돈이 얼만데’ 기껏 구시렁대겠지
아닐 거야, 모처럼 가정적인 남편을 흐뭇해할지도
돈 몇 푼으로 왕처럼 근엄해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오늘이야말로 꼭 그럴 것이다
밤낮 밭에서만 살면서 식모처럼 밥밖에 할 줄 모르는 여자
아이들 다 재워놓고 눈길을 마주하여 귀밑머리 만지면서
“당신 고생했어. 사랑해!” 오늘은 꼭
삼십 년을 간직해온 사랑을 고백해야지
그러면 펑펑 울까, 아니면 “징그럽게 무사 영 햄수광?” 할까
아니지. 그래도 가끔은 걸레질을 하면서 ‘사공의 뱃노래’를 흥얼거리는 여자긴 여자지
신발이 없다
밥이 더 깊어지기 전에 가야 한다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다
다시 신발장을 열어보았다
웬일인가, 칸칸마다 신발이 가득하다
먼지가 두둑히 쌓여 형체도 분간할 수 없는 것들
‘신발의 공동묘지’
저 죽은 신발들은 어느 산과 강을 건너왔을까
‘신발의 공동묘지’ 내 신발도 저 안에 누워 있는 걸까
지금 숨을 쉬고 있으니 나는 살아 있는 걸까, 좀비들처럼
걸어 다니는 시체들 사이에서 썩어가는 것은 아닐까
먼지만 푸- 푸- 날리면서
신발이 없다
그래도 집으로 가야 한다
이제야 말로 결단할 때이다
이러다가는 영영 밤에 갇힐지도 모른다
밤이란 거룩한 자의 밤이기도 하고 사악한 자의 밤이기도 하지
밤이란 못된 일을 꾸미는 흉물일 때가 많지
밤에 갇혀서 영영 집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기 전에 결단을 하여야 한다
그래 그렇지 맨발로 뛰는 거야
그래 원래 맨발이었지
아, 이제야 깨닫다니 참 늦었지만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뛰자, 맨발로 뛰자, 누구나 맨발로 뒤는 거지
결심을 하고 드디어 나는 냅다 맨발로 뛰었다
오른손으로 안주머니의 월급봉투를 꾹 누르고
웬일일까, 거리엔 한 사람도 없다
‘우글거리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조금만 더 가면 그리던 우리 집인데
겨우 500미터 거리에서 50년이나 걸리다니
저만치 우리 집 창문에 불이 환하다
아, 저기 우리 집 불빛, 눈물이 난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안방도 마루도 마당까지 환하다
작고 낡은 우리 집이 대낮보다 환하다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일까
빨리 가야 한다, 죽을힘으로 뛰었다 그런데
아무리 뛰어도, 뛰어도 제자리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질 않는다
저기가 우리 집인데, 저기가 우리 집인데……
누가 나를 불렀다, 아내였다
‘수원 윌스기념병원’ 1인실 반조명의 불빛이 졸고
아내는 환자복을 수의처럼 걸치고 침대에 앉아 있다
아내를 부축하여 변기에 앉히고 나와 의자에 앉았다
영화처럼 선명한 꿈이었다
무엇일까 이 싸늘한 여운은
짜르르- 오한이 전류처럼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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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체비 : 도깨비.
* 엉장 : 거대한 바위로 둘러싸인 굴처럼 우묵한 곳.
* 김종호 시집 『잃어버린 신발』(푸른 시인선 023, 2021)에서
* 사진 : 호주 발라드 호수에 설치된 ‘안토니 곰리’의 청동조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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