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득한 길
무한정 들어서니 첩첩산중 여름이다
차 한 대의 벼랑길 물러설 자리 없는
지리산, 안개 숲에서 순식간 세상 놓치던
너에게 이르는 길, 몇 번을 놓쳐야 하는지
졸참나무 손짓하는 풍경에 등 떠밀 듯
발밑은 아득한 절벽
끝내는 가야 하는
무엇을 찾으려 했나 이 길 끝에 이르러
청학의 날갯짓에도 여태 맴돌던 산 중턱
눈앞의 길을 두고서,
에돌아가던 그 여름
♧ 무자년, 고해성사
겨울 끝자락 마른 풀 화르르 타오를 듯
송당리 마을 지나 다랑쉬 저 억새들녘
누군가 확 그어대듯 이내 불꽃이 인다
발걸음 잠시 놓아도 허공에 눈물 젖는
덤불 속 찔레 제 몸 불씨 살리는 봄은
무자년, 고해성사로 이 땅이 주는 보속이다
광대나물 상모 돌리듯 섬 밖을 떠돌아도
끝내 못 내려놓던 내 등짝의 짐 하나
다랑쉬 잃어버린 집터, 푸른빛에 내려놓다
♧ 산수국
기도처럼 피어나는 유월 숲 젖은 꽃들
장맛비 기다려 쪽빛으로 물들고
몸 낮춰 옷깃 세우면 그대 향기 고인다
열엿새 기운 보름 끝을 잡고 열린다
인연의 뿌리 찾아 거슬러 오르면
산하나 묻어둔 가슴 발밑으로 잠긴다
천 년의 그 약속 기다림에 나선 길
저 바다 거친 파도 산자락 끼고 도는
날 세운 호미 자루에 휘감기는 뿌리로
보인다, 성서 속의 그 별이 보인다
내 온실 묘판 위에 잘 자란 불빛으로
숟가락 마지막 온기 꽃잎 새에 맺힌다
♧ 석굴암
한라산 북쪽기슭 부처 찾아 나섰다가
돌매화 통꽃 같은 암자 하나 만났었네
바위도 간절한 바위에 그냥 빌고 싶어지네
그 무슨 인연으로 산중에 사는 걸까
까마귀 울음으로 지쳐 누운 가을 산
비구니 건네는 찻잔, 단풍처럼 받아드네
폭락한 꽃값에도 아랑곳없는 장미농원
성성한 저 꽃송이 누구에게 받쳐질까
오늘밤 어느 마을에, 당도할 막버스 같은
솔가지 이정표 하나 어디로 가라는 걸까
허공에 저 허공에 여태껏 써 내리는
법구경, 나의 고백도 받으시라 산사여
♧ 폭염주의보
한여름 뙤약볕에 벼린 검 툭 내려 논
돌문화공원 광장 도열한 저 바위들
언젠가 온몸 휘감던 서늘함도 내렸다
천지사방 푸른 빛 새하얗게 바래져
맥문동 꽃대마저 품을 듯이 순해진
단단한 가슴 열었다, 사르르 녹는 여름
♧ 지상의 별
별 전망대 올라선 하늘은 먹구름 속
무심히
내리는 계단
저 아래
수많은 별빛
지상의 소문 피워내듯
서로 귀 쫑긋댄다
철탑이며 납작 집, 경계 없이 어우러진
청맹과니로 어둠의 둘레 그 어찌 가늠하랴만
뭇별들
한데 어울려
눈물 글썽인다, 웃는다
* 김윤숙 시조집 『봄은 집을 멀리 돌아가게 하고』(고요아침, 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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