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윤숙 시조 '아득한 길' 외 5편

김창집 2021. 7. 31. 00:29

아득한 길

 

무한정 들어서니 첩첩산중 여름이다

차 한 대의 벼랑길 물러설 자리 없는

지리산, 안개 숲에서 순식간 세상 놓치던

너에게 이르는 길, 몇 번을 놓쳐야 하는지

졸참나무 손짓하는 풍경에 등 떠밀 듯

발밑은 아득한 절벽

끝내는 가야 하는

 

무엇을 찾으려 했나 이 길 끝에 이르러

청학의 날갯짓에도 여태 맴돌던 산 중턱

눈앞의 길을 두고서,

에돌아가던 그 여름

 

무자년, 고해성사

 

겨울 끝자락 마른 풀 화르르 타오를 듯

 

송당리 마을 지나 다랑쉬 저 억새들녘

 

누군가 확 그어대듯 이내 불꽃이 인다

 

발걸음 잠시 놓아도 허공에 눈물 젖는

 

덤불 속 찔레 제 몸 불씨 살리는 봄은

 

무자년, 고해성사로 이 땅이 주는 보속이다

 

광대나물 상모 돌리듯 섬 밖을 떠돌아도

 

끝내 못 내려놓던 내 등짝의 짐 하나

 

다랑쉬 잃어버린 집터, 푸른빛에 내려놓다

 

산수국

 

기도처럼 피어나는 유월 숲 젖은 꽃들

장맛비 기다려 쪽빛으로 물들고

몸 낮춰 옷깃 세우면 그대 향기 고인다

 

열엿새 기운 보름 끝을 잡고 열린다

인연의 뿌리 찾아 거슬러 오르면

산하나 묻어둔 가슴 발밑으로 잠긴다

 

천 년의 그 약속 기다림에 나선 길

저 바다 거친 파도 산자락 끼고 도는

날 세운 호미 자루에 휘감기는 뿌리로

 

보인다, 성서 속의 그 별이 보인다

내 온실 묘판 위에 잘 자란 불빛으로

숟가락 마지막 온기 꽃잎 새에 맺힌다

 

석굴암

 

한라산 북쪽기슭 부처 찾아 나섰다가

돌매화 통꽃 같은 암자 하나 만났었네

바위도 간절한 바위에 그냥 빌고 싶어지네

 

그 무슨 인연으로 산중에 사는 걸까

까마귀 울음으로 지쳐 누운 가을 산

비구니 건네는 찻잔, 단풍처럼 받아드네

 

폭락한 꽃값에도 아랑곳없는 장미농원

성성한 저 꽃송이 누구에게 받쳐질까

오늘밤 어느 마을에, 당도할 막버스 같은

 

솔가지 이정표 하나 어디로 가라는 걸까

허공에 저 허공에 여태껏 써 내리는

법구경, 나의 고백도 받으시라 산사여

 

폭염주의보

 

한여름 뙤약볕에 벼린 검 툭 내려 논

 

돌문화공원 광장 도열한 저 바위들

 

언젠가 온몸 휘감던 서늘함도 내렸다

 

천지사방 푸른 빛 새하얗게 바래져

 

맥문동 꽃대마저 품을 듯이 순해진

 

단단한 가슴 열었다, 사르르 녹는 여름

 

지상의 별

 

별 전망대 올라선 하늘은 먹구름 속

무심히

내리는 계단

저 아래

수많은 별빛

 

지상의 소문 피워내듯

서로 귀 쫑긋댄다

 

철탑이며 납작 집, 경계 없이 어우러진

청맹과니로 어둠의 둘레 그 어찌 가늠하랴만

 

뭇별들

한데 어울려

눈물 글썽인다, 웃는다

 

 

                         * 김윤숙 시조집 봄은 집을 멀리 돌아가게 하고(고요아침, 2016)에서